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예수님의 부활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하나님의 광대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위에서 주관하고 계신다면, 그분은 죽은 자들을 일으킬 힘이 있으십니다. 만일 그분이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분은 우리의 믿음과 예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생명을 창조하신 분만이 죽은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고, 죽음 자체의 끔찍함을 되돌릴 수 있으며, 사망의 쏘는 것을 제거하고 무덤에서 승리하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4-55). 하나님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생명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예수님의 주장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그분의 부활은 그분의 사역을 입증해주는 “하늘으로부터 오는 표적”이었고 (마태복음 16:1-4), 그분이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권한까지도 가지고 계심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 (요한복음 2:18-22). 수백명의 증인들이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린도전서 15:3-8) 그분이 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성품과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결코 썩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시편 16:10), 예수님은 죽은 후에도 조금도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3:32-37 참조). 바울이 “이 사람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도행전 13:38-39)고 전할 수 있었던 근거도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신성을 가장 극명하게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미리 알려준 구약의 예언들을 입증시켜 줍니다 (사도행전 17:2-3).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마가복음 8:31; 9:31; 10:34).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도 부활에 대해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는, 구주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영생의 소망도 없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의 믿음은 “쓸모 없게” 될 것이며, 복음은 완전히 무력해 질 것이고,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한 채 그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4-19).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2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것 이상의 일을 하십니다; 그분 자체가 생명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힘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그의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5:1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갖게 되면서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15:53-57).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20)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죽음 이후의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인 인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중요합니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죽음을 초월한 창시자를 가지고 있으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똑같이 죽음을 초월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무덤에서 끝을 마친 사람이나 선지자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무덤은 그분을 붙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며, 오늘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히브리서 10:12).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 다시 오실 때, 믿는 자들의 부활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확증은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전서 15:55에 나오는 위대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호세아 13:14 참조).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은 이제 주를 향한 우리의 섬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부활에 대한 그의 담론을 마무리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8).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부활할 것을 알기 때문에, 주께서 그러셨던 것 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과 위험을 견딜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0-3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기독교 순교자들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약속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을 기꺼이 내려 놓았습니다.부활은 모든 신자에게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성경의 말씀에 따라 셋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3-4).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 그분이 오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되어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합니까?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명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 대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몸이 죽은 채로 남아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될 것을 보증합니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성경적 의미 제1회 예수님은 왜 죽어야 하셨나
제2회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나
제3회 예수님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셨나
제4회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이 무엇이 다른가
제5회 예수님의 부활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제6회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부활할 때에 왜 또 다시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까? 그리고 우리가 부활 시에 뵙게 될 예수님의 모습에서 ‘정녕 죽음’의 흔적에 가슴이 저미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1) 하나님의 형상의 보존과 회복으로서 부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든 고통(출생, 성장, 그리고 죽음)을 체휼하신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랍고 의미 있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이며, 그 부활체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체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데, 범죄하여 하나님이 ‘정녕 죽게 하신 바로 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는 인간의 ‘처음 모습’이 하나님께서 매우 의미 있게 만드신 형상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창 1:27).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도 인간의 모습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골 1:15, 3:10, 히 1:3). 범죄하여서 정녕 죽는 죽음 아래 있게 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자신(아담)의 형상을 닮은 자녀를 낳게 하시고(창 5:2~3), 그들을 통해서 태어난 생명의 귀중함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 때문이다(창 9: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2)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영생과 영벌 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향은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 그러나 이 부활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육적인 부활체를 입게 된다(행 24:15). 그러나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의인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에 참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악인은 사단과 함께 심판을 받고 영원히 지옥에 거하게 된다(요 5:29, 행 24:15).
심판의 부활을 입게 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를 피해서 죽기를 원해도 영생하는 부활체이기 때문에 죽지 못하고 고통 중에 거하게 된다(계 9:6, 6:15~16).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오히려 저주스러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들에게는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은 불변의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표현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더 좋았을 뻔한 사람들이다(막 14:2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하며,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세상에 관한 일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은 출생과 죽음에 관한 필연적인 사실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자신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녕 죽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기쁜 소식(복음)’인 것을 믿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롬 1:17). 그러나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 자신이 심판의 부활로 가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5~16).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6).
3) 부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명이 있음을 알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심은 모든 것의 완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완수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인류의 부활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세상에서의 사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말이란 이 세상의 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벧후 3:13, 계 21:1~2).
중요한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된다(요 5:25~29, 행 24:15)는 사실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둘째는 생명의 부활을 하여서 천국에 거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이 세상에서의 행위에 맞는 상을 주신다는 사실이다(마 5:12, 6:1, 10:41~42, 막 9:41, 눅 6:23, 35, 고전 3:8, 14, 요이 1:8, 계 11:18, 계 22:12). 여기서 말하는 상(미스도스; reward, wage)은 ‘임금, 삯, 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따라 주시는 상이다. 이 상은 천국에서의 또 다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상은 천국에 가는 사람은 누구나 받게 되기 때문이다(계 11:18, 22:12, cf.마 20:1~16). 그러나 분명히 구별은 있다. 이 구별은 아마도 천국에서의 직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마 10:41~42, 고전 3:8, 계 22:12).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찬송하는 것이 곧 인간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어떤 직임을 맡게 되어도 기쁨이 넘치는 곳이다(계 5:12~13, 7:12, 19:5~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4) 부활체에 있는 흔적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조금은 깨달을 수가 있다. 첫째로 우리의 질고를 지시는 예수님을 알 때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병자들을 고치신 것이 세상의 사람들이 능력이나 기술로 고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 사람들이 병을 고치는 것은 병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능력이나 기술을 가지고, 그들에게 베푸는 심정으로 고치지만 예수님은 그 병자의 아픔과 고통을 대신 지심으로 고치셨다는 것이다. 곧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만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모든 질고와 고통까지도 담당하심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셨다”(마 8:17, cf.사 53:4).
둘째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인류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설명이 있었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성경 구절로 대신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마지막으로 부활체에도 존재하는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볼 때 그 고난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을 수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체를 보이시면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셨다. 신령한 몸이신 부활체에까지도 그 십자가의 고난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아마도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뵈올 때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에 그 몸에 있는 고난의 흔적 때문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들이 신령한 몸과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천국!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온전해진 하나님 나라! 그러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 모습이 예수님의 몸에 있는 고난의 흔적일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보는 순간 우리가 당했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대신하신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가슴이 미어지는 감동으로 말미암아 흘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죄로 인한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씻어 주실(계 7:17, 21:3~4) 하나님께서 그 감동의 눈물도 씻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더 이상 눈물이나 슬픔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예수의 부활(resurrection of Jesus, 復活)은 안식일 전날(현재의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안식일 다음날(현재의 일요일)에 무덤에서 되살아 난 사건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신앙을 형성한다. 이것은 단순히 한 인간이 죽음에서 되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 난 것으로 스스로 하느님이자 인간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나아가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사하여 구원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죄과(罪過)를 씻기 위한 죽음이지만, 부활은 인간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로써 하나님 스스로가 생명과 죽음의 주(主)임을 계시했다고 성경에서는 말한다. 바울로도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선교(宣敎)는 헛된 일이며, 또한 여러분의 신앙도 헛된 것이다”[1]라고 말했으며, 또한 그 스스로가 부활한 그리스도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여 그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요 [ 편집 ]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한 지 사흘만에 부활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기독교의 믿음과 신학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의 부활은 부활한 지 사십 일이 지나 하늘에 오른 일과는 다른 것이다.[2][3]
신약성경에서 로마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는 새로운 무덤에 묻혔으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 하늘에 오르기 앞서 사십 일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봄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인 성 금요일 사흘 뒤인 부활절에 예수의 부활을 축하한다. 부활절 시기는 유월절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복음서의 일화에서 예수는 그가 죽어서 부활할 것임을 예언하고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에 기초한다고 말하였다.[4]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구원과 구속이라는 계획의 일부로 본다.[5]
성경에 기록된 예수 부활의 증거 [ 편집 ]
역사성 [ 편집 ]
문헌 비평 [ 편집 ]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후 50~58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인정되는 바울로 서신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로는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예수의 고난과 사망, 부활, 그리고 언젠가 있을 재림의 모습을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특히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1~8절에서 바울로는 자신이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여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하는데 베드로에게 나타난 뒤 열두 제자, 그리고 오백 명에게 동시에 나타난 뒤 야고보, 그리고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난 뒤에 자기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적는다.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여성들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은 적지 않는데, 하버마스는 이것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큰 신뢰를 부여하지 않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6개월 ~ 3년 이내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책은 기원후 70~11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인정되는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이다. 그러나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의 저자는 부활한 예수와 직접 만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로 마르코의 복음서의 초기 사본들 중에는 예수의 부활 후 이야기를 담지 않은 소위 “짧은 끝맺음” 사본이 많이 있다. 둘째로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글레오파와 베드로에게 등장한 뒤 열두 제자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사도행전에서 바울로에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바울로의 증언과 동일한 것이다.
갤러리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 고린도전서 15:14 ↑ J. E. L. Newbigin,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London: SPCK, 1989), p.66. ↑ Resurrection of Christ.” Cross, F. L.,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 Dictionary of Premillennial Theology by Mal Couch 1997 ISBN 0-8254-2410-0 127쪽 ↑ ISBN Great Preaching on the Resurrection by Curtis Hutson 2000 0-87398-319-X pages 55-56 ↑ 마가복음 ‘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