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42 정조 의 업적 293 Most Correct Ans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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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한국사 – 조선 후기] 11.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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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생애와 업적:화성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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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찬 자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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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생애와 업적:화성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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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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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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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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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正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규장각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해갔으며,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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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正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규장각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해갔으며,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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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정조(正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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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업적과 그 죽음. 독살설에 대해서 -3(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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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업적 셀수없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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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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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업적 셀수없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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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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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편집]

즉위 초기[편집]

정치[편집]

토목 사업[편집]

외교[편집]

문화[편집]

재위 후반[편집]

가족 관계[편집]

일화[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정조가 등장한 작품[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주해[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조선 정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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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업적 을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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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업적 을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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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업적 을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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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그는 아버지의 비극적이고 잔인한 죽음을 11살의 나이로 맞게 되었다.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11세의 어린 정조의 참으로 간절하고 비통한 심정을 헤아릴수있을까…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고

영조는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면서 결국

정조, 그의 나이 25세때 여러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정조의 업적

홍국영을 통해 자신의 정적들을 없애는 것을 통해

정조는 이후 각종 개혁들을 추진 할수 있었다.

탕평책추진

그는 그의 할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여 탕평책을 추진하였는데 한동안 정치에서 소외된 남인까지 등용하였고, 그의 반대 세력이자 자신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죽음이 오히려 잘됬다고 생각했던 벽파 세력까지도 포섭하여 협력하였고 이런 노력을 통해 많은 정치적 통합을 이루었다.

장용영 설치

홍국영과 친숙이자 같은 세력이였던 홍복영이 역모를 당하자 정조는 왕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경과의 합격한 무사들을 흡수하여 장용위를 설치하였는데 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 되었다.

규장각 설치

여러 학자들을 육성 하고 등용하였던 규장각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서 인재를 육성하고 이로 문신들을 선발 하고 교육해 자신의 친위세 력으로 확보하였고, 규장각 내에는 검서관이라는 제도가 있어 서얼(첩의 아들) 신분을 등용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등용된 학자들은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는데 이들은 박지원의 제자들인다 그러나 서얼이라는 이유로 펼치지 못하였던 재능이였는데 ,그 기회를 정조가 제공해 준 것이였다

대전통편 편찬

영조가 편찬한 속대전에 내내용에 필요한 내용을 증보하여 만든 조선의 법전이다. 현재 현존 하는것은 6권 5책이고 인쇄본이다. 이외 정조는 법전 뿐만 아니라 여러 책들을 편찬하는데 노력하여 조선후기 문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백성을 위한 정책

백성이 사형을 당하기 전에 3번을 조사 하는 등 여러 백성들을 위한 제도와 여러 상소 제도들을 개방하였다.

금난전권 폐지, 신해통공 실시

육의전 외의 다른 상인에게는 도가권을 주지않았고 이를 통해 조선 상업이 한단계 발전 할 수 있었다.

화성축조

수원 화성

화성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이장을 계기로 조성되었으나 정조는 자신이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화성이 지어질때는 그가 육성하였던 정약용 등 친 세력들을 투입하였고 성밖에서는 농사가, 성 안에서는 통공정책을 통해서 자유로운 상행위가 이루어 질 수 있었다. 화성은 당시 정조가 원한 개혁의 결과의 응축물이였다.

그의 개혁은 성공적이였을까?

정조.. 그는 정적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 하고자 하여 밤낮으로 공부를 하고 틈틈히 무예를 다져 활로 화살을 50발을 쏘면 그중에는 49발이 맞을정도로 엄청난 문무를 겸비한 왕으로써

조선 후기를 꽃피웠지만 결국 의문의 죽임을 당하여

그의 개혁 목표와 이상은 시들어 버렸다.

또한 정조가 죽자 그가 규장각을 통해 육성했던 훌룡한 인재들은 대부분 축출되고 세력하나에만 치우쳐져 정치와 경제적 독점이 심각해졌다.

제가 이글을 쓰는데는 2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추천은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추천 부탁드립니다.

주 01)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참상(參上)·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곧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사서·삼경 등의 당판서적(唐版書籍)의 수입 금지 조처도 이와 같이 자기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續五禮儀)』·『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국조보감(國朝寶鑑)』·『대전통편(大典通編)』·『문원보불(文苑黼黻)』·『동문휘고(同文彙考)』·『규장전운(奎章全韻)』·『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이 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해 뒷날 『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로 간행되도록 하였다(1814).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세력을 구축하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匡正)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건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이자,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다고 이해된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했을 뿐 아니라 예론(禮論)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해 왕권 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지닌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해 그 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검서관들의 신분은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해 ‘서얼통청운동(庶蘖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 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해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갔다.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여기서 인왕산을 중심으로 경아전(京衙典)이 주축이 된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인(委巷人)들이 귀족문학으로 성립되어온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해 그들만의 ‘옥계시사(玉溪詩社)’를 결성하고, 공동시집인 『풍요속선(風謠續選)』을 발간하는 등 성관(盛觀)을 이루어 중인문화의 원동력이 되고 뒷날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의 효시를 보게도 되었다.

정조대의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조선중화의식(朝鮮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조선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禮治)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해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고유문화현상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문화의 제반 분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國畫風)’,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것이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일성록(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였던 서학(西學)에 대해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해 사면해야 하는 갈등을 겪었다.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고종 때 장조로 추존됨) 또한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하였으며, 용주사(龍珠寺)를 세워 원찰(願刹)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 완수하였다.

옛 수원 관아가 있던 화산에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대신 팔달산 기슭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어머니의 회갑연을 화성 행궁에서 열었다. 권신(權臣)들의 뿌리가 강고한 서울에서 벗어나 신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적 구상을 가진 것이었다.

주 02)’로 표현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왕은 통치자일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해 모범을 보여 큰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였다. 왕의 말을 ‘ 교(敎) ’로 표현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왕은 통치자일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해 모범을 보여 큰 스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였다.

조선이 성리학이념을 채택하고 ‘우문정치(右文政治)’로 표현되는 문화정치를 표방한 지 400년만에 명실 부합한 전형적인 학자군주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이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가 있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영도할 수 있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시대에 탁월한 학문적 능력으로 군사의 위상을 확보하여 문화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정조의 업적과 그 죽음. 독살설에 대해서 -3(終)-

이전글에서 정조의 즉위와 홍국영의 독주, 그 결말까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누구보다도 왕이라는 자리의 책무를 성실하고 열심히 수행했던 정조대왕의 업적과 그 죽음까지 다뤄볼까 합니다.

이전 글

[Story of Kings] – 정조, 조선의 22대 왕, 즉위까지의 험난한 길 -1-

[Story of Kings] – 정조, 홍국영과 규장각 -2-

정조는 재위 4년까지는 왕권의 안정과 정적 제거, 사도세자 추존등 과거 청산에 주력하였습니다. 암살시도가 있을 정도로 위태로웠던 시기를 보낸 정조는 정적들인 노론들에게 흠을 잡히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였습니다. 작은 예를 들자면 정조의 승은을 입어 의빈이 된 성씨의 경우 그 관계가 언제 맺어졌는지를 정조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의 눈으로 번득였던 노론조차도 몰랐습니다. 정조가 직접 성씨의 임신사실을 알리고 빈으로 책봉하기까지 그 임신 사실조차 아는 이가 없었을 정도로 신중함을 보였는데 정조는 평생 여자 문제에 대해서도 단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을 정도로 그 자신이 약점이 잡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조의 개혁과 업적

정조가 묻힌 수원의 건릉

정조가 최대의 정적이라고 할수 있는 노론을 상대하는 방법은 할아버지인 영조가 신하들을 학문으로 누르려 했듯이 그 역시 철저하게 학문으로 그들을 상대하였습니다. 성리학을 명분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학문을 무기로 산림을 형성하여 이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해왔는데 정조는 세종과 비슷하게 신하들을 압도할 정도의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학문을 나누는 경연에서 송시열의 아들인 송덕상을 만난 정조는 그를 압도해 버렸는데 권력다툼에만 빠져 자신들의 큰 무기인 학문에는 소홀했던 노론의 실력이 거품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학문으로 노론을 압도한 것은 이후 실력파 남인과 소론을 대거 등용하여 이른바 탕평정치를 시작할수 있게한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탕평책은 이론적으로 붕당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할아버지인 영조가 비교적 유화된 탕평론을 실현하려 했다면 정조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격렬한 논쟁, 토론을 통하여 실력자를 가려내고 그 방안을 채택하는 방식으로 남인, 소론 뿐만 아니라 노론에서도 실력이 뛰어난자를 가려 등용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실력없는 외척과 기존 노론 집권 세력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왕권강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물론 이 탕평책도 최근에는 성리학적 이상에 갇혀 새로운 실학과 북학등의 사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적 명분, 의리를 더 강화시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만든 부분이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1785년에는 왕권강화를 위한 군사세력으로 장용영을 창설하여 왕의 친위세력으로써, 정예군으로 육성을 하였습니다. 쓸모 없는 기존의 군사력은 해체하고 실력있는 군사력을 키우고자 한다는 명분으로 기존 5군영 중 수어청과 총영청을 폐지하고 만든 것이 장용영이었습니다. 정조 자신이 직접 군사지휘를 하기까지 하는등의 열의를 가지고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장용영내의 무과를 통해 급제한 자들은 서얼과 평민들도 많은 비율을 차지하여 사실상 실력위주의 군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 수는 처음에는 30명에서 출발해 수원 화성으로 진영을 옮긴 이후는 18,000 여명으로 불어나 사실상 조선내의 최강의 정예 군사력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법체계로는 대전통편을 발간하여 조선 창건시의 경국대전과 영조시대의 속대전을 합쳐 새로운 법체계를 세웠습니다. 이 법체제에는 탕평책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신해통공은 시전 상인의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오랜시간 정치와 결탁 해왔던 일부 시장 거상들의 결속을 막고 정경유착의 폐해를 막는 한편 일종의 경쟁 체제 도입을 통해 치솟는 물가를 잡으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재벌이 누리던 경제 정책상의 특권적인 부분을 개혁하여 정치권과의 결탁을 막으려는 시도와 견주어 볼수도 있을듯 합니다. 이론적으로 올바른 정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점에 대한 견제안을 가지지는 못해서 영세 상인보다는 이득이 일부의 독점적 도매상들에게 집중되어 정조시대에 치솟는 물가를 잡는데는 실패했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정조는 그 어떤 왕보다 더 많은 암행어사를 파견한 왕이기도 합니다. 재위기간 중 총 60회의 암행어사와 53회의 별건의사를 파견하여 지방의 사정을 파악하고 수령의 전횡을 막아 민생의 안정을 이루려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정조의 정치는 서찰 정치라고도 일컫어 집니다. 마치 지방의 총독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은 로마의 5 현제들 처럼 대소신료들과 직접 쓴 서찰을 보내고 받은 서찰의 답장을 쓰는일을 지속했습니다. 블로그 댓글도 자주 밀리는 게으른 저로써는 그 격무가 어땠을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조는 당시 북학파와 실학자 사이에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에 대해서 북학자인 박지원을 지목하여 연암체라고 나무라며 자송문(반성문)을 쓰게 할 정도였는데 그 자신이 쓴 서찰에서 속담, 이두, 욕설, 비속어를 아무런 가감 없이 사용하였습니다. 글쓴이가 추측해 보자면 나라를 대표하는 왕으로써 올바른 문체를 권장하여야 하는 부분을 왕으로써 시행한 것이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그런 문제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듯 합니다.

그렇지만 정조는 흔히 알려진것 처럼 실학을 널리 장려한 왕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가장 성리학에 정통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꽉 막히지 않은 유연한 태도와 인재 등용을 통해 결과적으로 성리학이 아닌 청의 선진문물을 배우려는 북학과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실학이 발전할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상생과 화합이라는 정조의 꿈이 담긴 도시 수원화성

화성 행차도

정조가 생각한 개혁의 완성은 연산군처럼 왕 한사람을 위한 절대 왕권의 확립과 피의 복수가 아닌 상생과 화합을 이루는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당시의 노론을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비록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학문적인 사상에 대한 신봉에 가까웠지만 어느 시대나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광신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이 때문에 정조는 노론을 학문만이 아닌 권위로도 누르고자 모종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계획의 일부로 정조는 1789년 수원을 화성으로 승격시키고 수원 부사의 품계를 유수로 두 단계 올립니다. 이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를 왕으로 사후 추존하기 위한 시도에서였는데 (결국 사도세자는 고종때에 이르러서야 장조로 추존) 이 무덤에 현릉원이라는 묘호를 올린 정조는 수원이라는 도시를 요즘으로 치자면 강한 방위력을 가진 자립형 신도시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기록중 재미 있는것은 이땅의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부지 매입시에 그 주변의 땅값을 시세에 맞도록 계산하여 백성들에게 보상하게 하고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에게도 품삯을 적절하게 지불하여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세심히 살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입니다.

1792년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을 설계하고 축조하는데 유용한 도구를 개발하게 하였는데 이에 정약용은 거중기를 개발하여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완공시까지 이를 잘 활용하여 채제공이 총 책임자로 화성을 완공시켰습니다. 더구나 정조는 “화성성역의궤”라는 성을 축조하는 동안의 모든 기록을 상세히 남기게 해서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며 파괴된 수원화성을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수원화성 서북각루 주변

수원 화성에는 둔전을 위한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고 선진적인 농업 기술과 경영방식을 시험적으로 운영하고 (이 때문은 아니겠지만 현재도 농작물 시험재배소가 수원에 있습니다.) 수원 일대의 상인들을 유치하여 자유로운 시장을 조성하였습니다. 이 성은 현재에도 조선시대 축성기술을 집약한 성으로 평가받으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자립형 계획도시로써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동북 공심돈 주변

서북 각루 주변

화성이 축조된 후 정조는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화성에서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었기에 이 회갑잔치는 세상에 없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것이기도 했습니다. 즉 즉위 20년을 맞은 정조는 화성행차를 통하여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왕의 아버지로써 사도세자를 인정받게 하려했던 것입니다. 회갑연을 위한 출발일은 혜경궁 홍씨의 생일이 아닌 사도세자의 생일인 1월 21일로 부터 49일(49재를 고려한)이 지난 2월 9일이었습니다. 연회는 총 8일에 걸쳐 진행하였는데 이 8일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있던 기간과 일치 합니다.

이 행차는 115명의 악기연주자, 238명의 기수를 비롯해 1,779명의 수행인원과 779필의 말이 동원된 화려한 어가행렬이었다고 합니다. 혜경궁 홍씨만이 아닌 사도세자까지 고려한 이 부모님을 위한 회갑연이 만 백성의 축제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이때문인지 오늘날에도 정조의 화성행차를 재연한 행사가 수원 화성 주변으로 매년 커다란 축제의 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goodjcs블로그

정조는 이 화성행차를 통해 신하들에게는 임금의 권위를 보여주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화성에 도착한 직후 진행한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은 정적들이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군사 훈련을 통해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의 위력을 가감없이 확인한 노론들은 두려움에 할말을 잃었습니다.

치밀하게 이 행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였던 정조는 궁으로 돌아온뒤 그 위력과시를 바탕으로 노론을 축출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탕평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정조가 원한 것은 당쟁으로 인하여 죽고 죽이는 비극이 아니라 상생을 통한 국가의 발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조가 노론벽파의 핵심인 심환지에게 보낸 297통의 어찰에는 어제의 정적을 오늘의 동지로 품어 더 나은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정조의 죽음과 독살설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면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으로 옮겨 여생을 보내려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1800년 6월경 부터 종기를 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회복하지 못하고 재위 25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이른 죽음과 정적인 노론 벽파와의 관계 때문에 그의 죽음에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 근거는 연훈방을 통한 수은 중독인데 이 연훈방 치료법을 어의를 통해 주관한자가 노론 벽파인 심환지와 이지수 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조 스스로가 자신의 병세를 심환지에게 알리고 자주 협의를 하고 처방전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거의 한달에 가까운 투병후에 사망하오 현재의 주류 연구는 잘못된 치료방법에 의해 더위와 피로, 수은중독으로 인한 사망으로 보는 견해가 더 큰것 같습니다. 그 근거로 정조의 치료법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은점, 투병기간 외에도 1806년 순조(5년) 벽파가 일망타진 되는 병인경화 시기에도 정조 독살설에 대한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글쓴이의 생각에는 정조의 죽음에 독살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는 그가 아직은 더 개혁을 펼쳐 나갈수 있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명을 다한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죽은후 아버지의 옆인 융릉 옆에 묻히고 싶어했기에 그의 유언에 따라 처음에는 융릉 동쪽에 위치하였다가 1821년 그 자리가 흉지라는 김조순의 주장으로 현재의 건릉의 위치로 효의왕후와 합장되었습니다. 현재 수원에 융건룽은 시민들이 나들이 하고 산책하기에 너무 좋은 공원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정조와 사도세자 부자는 현재도 수원이라는 도시에 커다란 혜택을 주고 있는 왕인듯 합니다.

융건룽 주변

융건릉 주변

이미지 출처 : slr클럽

조금 이른 49세의 나이, 그의 죽음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가 할아버지인 영조만큼만 살아서 그의 개혁이 완성을 보았더라면 그의 사후 시작되는 외척과 세도정치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의 혼란은 늦추어 졌을까요?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한국의 역사과목 교사들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위운 순간으로 정조의 이른 죽음을 1위로 꼽고 있는걸 보면 사람들의 생각은 다들 비슷한가 봅니다. 세종이 그러했듯 정조 역시 세상을 떠날 당시 신체나이는 매우 노쇠한 노인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두 왕을 대왕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의 정치가 어떤 업적이 있었다로 평가하기 보다 왕으로써의 책무, 즉 어떻게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히 할것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그 책무를 다하고자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다는 점 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들 때문에 그들은 대왕으로 불리우고 후세에 남을 업적을 만들수 있었던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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