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39 회개 에 합당한 열매 Top Answer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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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시리즈]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인가? | EP.12
[What?시리즈]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인가? | E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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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아이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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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백석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아이굿뉴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와 … 회개는 생명 회복의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죄의 벌을 받는 것 말고는 달리 용서 받을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 살던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삶과 생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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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아이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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µ¶»çÀÇ Àڽĵé¾Æ, ȸ°³¿¡ ÇÕ´çÇÑ ¿­¸Å¸¦ ¸ÎÀ¸¶ó! – ´ç´ç´º½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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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 (눅3:8-14) – Theology of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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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명성교회 –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마3:7~10)_2021-09-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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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동탄명성교회 –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마3:7~10)_2021-09-19(주일) ~에 상응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회개에 적합한 무게를 가지는 열매’라는 뜻이며, 그 말은 자신이 진정 회개를 했다고 … 어느 날 문득 한 번 얻은 구원이라도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성도는 회개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회개 중에서도 열매 맺는 회개를 못했을 경우 결국에는 버림받아 꺼지지 않는 불 못에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동탄신도시에 세워진 교회입니다.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동탄신도시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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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영상

주일낮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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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명성교회 -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마3:7~10)_2021-09-19(주일)
동탄명성교회 –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마3:7~10)_2021-09-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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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에 합당한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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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에 합당한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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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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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방법 쓰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거나, 오직 자기만을 위해 쓰는 이기적인 삶을 살 때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회개를 했어도 진정 회개 … 2017년 누가복음 제4 강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씀/ 누가복음 3:1-20 요절/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이창무,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 안암 UBF 목자, 찬양 인도자, 성경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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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눅 3:7-14) – 유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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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눅 3:7-14) - 유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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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및 주제 연구 52p

‘스크루지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에 등장하는 욕심쟁이 스크루지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고 마음씨 좋은 사람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끝날지를 미리 알면 지금까지의 삶, 그리고 현재의 삶을 교정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관점에서 한 해를 되돌아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성도들은 ‘마지막날 주님께서 내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라는 질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주님께서 내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열매를 맺었는가’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열매’에 관한 본문은 종말론적 심판의 문맥에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이 글에서는 ‘열매’에 관한 복음서의 본문 두 개, 그리고 이와 관련된 본문들을 묵상함으로써 성경적 스크루지 효과를 얻어보고자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 3:7~14)

1. 독사의 자식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했던 사역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일이었다눅 3:3. 요한의 사역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막 1:5. 세례는 세례 받는 자의 회개와 하나님의 죄 용서를 보여주는 신앙 행위였다. 그것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었다눅 3:4.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마땅히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1을 반겨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심한 욕을 퍼부었다. 도대체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을까?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을 향한 세례 요한의 독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작자가 그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고, 그 방책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냐는 뜻이다. 만약 내가 요한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절대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면 왜 요한은 이런 독설을 퍼부었을까?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한다. 8절에 따르면 이들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속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이 말은 이들이 혈통적으로 유대인임을 뜻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자부심 때문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세례 요한이 통렬히 지적한 것은 바로 그들이 망각한 한 가지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자신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8절는 그의 비장함을 보여준다.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없는 이 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노라고 선포한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혈통은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돌에게서 나왔다. 이사야 51:1~2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셔서 자손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마치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과도 같았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택함 받은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이것을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이지 교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 그렇다면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2.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1)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요한은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8절를 맺어야 한다고 요한은 소리 높여 주장한다. 그저 ‘회개’가 아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요한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듣고 있는 무리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요한을 찾아왔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였다.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한 채 자신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무리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싶어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례는 단순히 입술로만 죄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종교의식이 아니었다. 세례가 죄 사함을 받게 한다면 그것은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시는 죄악 된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과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만약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아무리 세례를 받아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이며,2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아니,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되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이 엄중한 경고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눅 13:6~9에서 ‘한 사람’은 하나님을, 포도원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사 5:1~7; 렘 8:13 참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열매를 구하셨지만 얻지 못하셨다. 무화과나무는 해마다 열매를 맺어야 했지만 3년 동안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땅에 있는 자양분만 고갈시킬 뿐이었다. 포도원 주인이 3년을 지켜보았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 기회를 주었다는 말이다. 포도원 주인은 당장에라도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때 포도원지기가 한 번 더 기회를 요청한다. 그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노라고,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때 가서 찍어버리라고 주인에게 간청한다. 여기서 포도원지기를 예수님으로 풀이한다면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살지만 그래도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님 덕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 비유 직전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3 그들을 죽인 사건과 관련하여 질문을 하고 여기에 대답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눅 13:1~5. 여기서 예수님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3라고 경고하셨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님을 지적하시면서 마찬가지로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엄중히 경고하셨다. 이 두 본문이 어서 회개하여 심판을 피하라고 일러준다면 그 직후에 나오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세례 요한이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내용이 먼저 나오고눅 3:3~6, 그 후에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촉구하는 흐름과 일치한다.

마리아와 사가랴가 찬송한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기억하시고, 그의 후손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눅 1:54~55, 72~73.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는 것에 감사하여 그의 백성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로 응답해야 한다.

2) 더 이상 늦기 전에 어서 행하라! :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

나사로에게 단 한 번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부자는 때늦은 회개가 소용없다는 진리를 일깨워준다. 이 부자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고, 아브라함이 부자를 ‘얘’테크논 tevknon로 부른 것, 그리고 아브라함이 부자의 형제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은 보장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최고급 명품 옷을 입고 ‘날마다’카쓰 헤메란 kaq j hJmevran 럭셔리한 삶을 살면서도 -‘날마다’카쓰 헤메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의 삶과는 정반대다!-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던 거지 나사로에게 자비 한 번 베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일이었다.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 때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내세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은 거지 나사로였다.

그렇지만 이 부자는 자기 형제들만큼은 “이 고통 받는 곳”16:28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죽어서 이미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하면 자기 형제들이 ‘회개하게 될 것’16:30이라고 말한다. 내 형제들은 자기처럼 때늦은 회개를 하지 않기 바란다는 것이다. 이 때 회개란 무엇일까? 비유의 내용을 보건대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그것은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다.

따라서 서둘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혈통에 관계없이 신분과 무관하게 그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해 주실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바로 내가 아닐까? 작년과 다를 바 없이 올해도 나는 송구영신예배, 신년 예배를 통해 한 해를 회개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삶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다. 해마다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 마음에 위안이 될까 하여 나오는 것은 아닌가?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일이다.

3. 삶 속에서 실천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1) 속 옷 두 벌 가진 자도 나눠야 한다

무리들은 세례 요한의 질책을 듣고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라고 요구한다.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옷’키톤 citwvn이란 속옷을 말한다. 누가복음 6:29을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옷이 나온다. ‘속옷’은 3:11에서도 언급된 ‘키톤’이며, ‘겉옷’은 ‘히마티온’iJmavtion으로서 겉에 입는 긴 옷이다. 속옷은 그 안에 입는 짧은 옷을 말한다. ‘속옷 없는 자’란 가장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가지지 못한 자들을 뜻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속옷 한 벌 없는 자가 있을까? 요한의 이야기는 극단적이다. 그러나 요한이 속옷 두 벌을 가진 자가 속옷이 한 벌도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줘야 한다는 것은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조차 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비록 자신도 속옷 두 벌밖에 없지만 함께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렇듯 나눔의 삶을 말한다. 나눔은 부자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옷 두 벌 정도는 거지가 아닌 한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나눔은 모든 이가 실천해야 할 삶의 모습이다.

2) 정해진 것만 받아라

두 번째로 세리가 등장한다. 세리들 역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왔다가 요한이 무리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세리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12절라고 묻는다. 이에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13절고 요구한다.

주후 1세기 초반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먼저 세금은 직접세와 간접세가 있는데, 간접세는 항구로 들여오는 상품이나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 통과할 때 소지한 상품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으로서, 항구나 성문 근처에 위치한 세관에서 거둬들였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난 여리고눅 19:1~10는 로마 속주 유대와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지인 베뢰아 사이에 위치했다. 반면에 인구세poll tax = tributum capitis나 토지세land tax = tributum soli와 같은 직접세는 로마 제국이 직접 고용한 자들에 의해 징발되었다. 로마 총독이 관할하지 않던 갈릴리의 경우도 헤롯 안티파스의 감독하에 그의 공무원들이 직접세를 거둬들였다. 간접세를 거둬들이는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 세리tax-collector였다.

간접세는 로마제국이 직접 관할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맡겼다. 즉 어떤 유대인이 특정 지역에 대한 간접세 징수 권한을 로마 당국으로부터 받는다. 입찰을 통해 이런 일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로마 당국에 징수를 허락 받은 지역의 간접세를 미리 지불한다. 그는 자기 밑에 부하 직원들세리들을 두거나 하청을 줘서 세금을 거둬들인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이 때 정해진 세금 그 이상을 거둬들여 부를 꾀했던 것이다.4

세리들이 당시 사람들, 특히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로부터 경멸을 받았던 이유는 그들의 세금 수탈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윤commission을 가능한 한 많이 남기기 위해 그들이 로마 당국에 선불로 지급한 액수를 훨씬 초과하는 세금을 거둬들였다.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 온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한 것이나, 삭개오가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19:8이라고 말한 것은 당시 세리들의 횡포를 짐작케 해준다. 요한은 이러한 세리들의 착취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받는 월급에 만족해라

세 번째 등장인물은 군인들이었다. 로마 군병일 수도 있지만, 요한이 세례를 준 곳이 요단강 부근3:3이라고 할 때 이곳은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지였던 베뢰아일 수 있다. 당시에 헤롯 안티파스는 군인을 거느렸다. 혹은 세리들을 보호해주던 유대 군인들일 수도 있다.5 이들 군인들은 세리를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강탈했다. 그래서 요한은 이들 군인들에게 돈을 뺏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코판테오’sukofantevw는 원래 ‘무화과나무를 흔들어 그 열매를 드러내다’라는 뜻인데,6 여기서부터 금전적 이득을 얻기 위해 ‘거짓 고소하다’ 혹은 ‘사기 쳐서 강탈하다’라는 의미가 가능하다.7 이런 일들을 그만두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는 것, 이것이 군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는 세리와 군인들에게 요구된 삶이 매우 구체적임을 알 수 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 삶 속에서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내 지위를 이용하여 내 탐욕을 채우는 일,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리非理다. 나는 이것에서 떳떳한가?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일을 당장 중단하는 일,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길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막(눅 19:1~10)

1.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이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아는 삭개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깨끗한’, ‘순결한’과는 달리 탐욕스럽고, 부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다.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불리며 조롱받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세리들은 동족을 착취하여 배를 불렸고, 로마에게 봉사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매국노라고 불렸다. 이러한 윤리, 도덕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세리들은 정결법상으로도 ‘더러운 죄인’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직업상 이방인들과 많이 접촉해야 했고, 로마황제의 상이 새겨진 돈을 날마다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사람들에게, 특별히 율법에 엄격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경멸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삭개오는 특별히 키가 작았는데, 주후 1세기의 사람들은 키가 작은 사람들이 소심하고, 탐욕스럽다고 생각했다. 신체적인 왜소함은 웃음거리였다. 어쩌면 삭개오는 작은 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그것은 삭개오의 열등의식을 부추겼고, 그의 열등의식은 사람들에 대한 적대심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자,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7절라고 수군거린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러주셨다9절.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불린 삭개오가 구원받은 백성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삭개오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삭개오는 자신에게 사랑을 보여준 예수님께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노라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삭개오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을 그 재산의 절반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 유대교에서 자신의 재산의 20%만 내놓아도 관대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삭개오는 50%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또 그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입술로만 고백하지 않고 네 배나 갚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 5:16; 민 5:7 착취한 것에 20%만 더 주면 해결되었다. 삭개오는 네 배로 갚겠다고 했으니, 이러한 삭개오의 의지는 그가 철저히 과거의 삶으로부터 돌이켰음을 보여준다.

2. 삭개오와 부자 관리, 그 공통점과 차이점

삭개오 이야기는 18:18~23에 나오는 부자 관리의 이야기와 대조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리 역시 큰 부자였고18:23, 삭개오 역시 부자19:2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 관리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켜온 경건한 사람인 반면에 삭개오는 죄인이라고 조롱받았다. 그렇지만 관리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못했으나 삭개오는 예수님이 그런 요구를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고 말씀하셨다18:24~25. 그렇다면 삭개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즉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해낸 사람이다. 그는 과연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8다.

3. 삭개오의 변화는 예수께서 먼저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이런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먼저 그에게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이 보고 싶어졌다3절.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은 마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만약 그저 호기심에 불과했다면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그는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장애물에 굴하지 않았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4절. 그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정에 응답하여 예수님도 삭개오를 바라보셨다5절.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지금도 바라보고 계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아무도 자기 집을 찾아오지 않았을 삭개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 사랑이 삭개오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아래서 볼 수 있듯이 삭개오 이야기는 교차대칭구조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신 구절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이 이야기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A 예수의 행동(1절)

B 삭개오 소개(2절)

C 삭개오가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볼 수 없음(3절)

D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감(4절)

E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심(5절)

D´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옴(6절)

C ´사람들이 수군거림(7절)

B´삭개오의 결단(8절)

A´예수님의 말씀(9~10절)

또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예수님의 소명 선언9~10절이 삭개오 이야기의 결론이라는 사실도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신 일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는 점을 지지한다.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15~27)

1.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방법: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에서 열매에 관한 본문은 앞서 언급한 누가복음 3:7~14의 병행본문인 3:7~10이다. 그 다음은 산상수훈5~7장의 마지막 부분인 7:15~20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아마도 이곳저곳을 떠돌던 반反율법주의자들antinomians로서, 참된 믿음을 곡해하여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로 추측된다. 이들은 극단적인 바울주의자였을 것이다.9 13~14절에서 말하는 바, 넓은 문, 넓은 길을 가는 자들은 바로 이들처럼 말씀의 행함을 통한 신앙의 성숙을 이루지 않고 값싼 은혜, 값싼 믿음을 주장하는 자들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이들이 양의 옷을 입었으나 실제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이들의 정체를 잘 파악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시한 식별 방법은 그들의 열매다. 여기서 열매란 그들의 행동을 말한다. 말이 아니라 실천이요 인격이요 삶이다. 좋은 나무라면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아름다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로스’kalo,j와 ‘나쁜’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로스’ponhrov~는 열매의 품질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윤리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단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란 행동이요 삶이라는 말이다. 속이 노략질하는 이리라면 아무리 겉에 양의 옷을 입었어도그래서 미혹되기 쉽지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은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마 3:7. 누가복음에서는 무리들, 눅 3:9에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열매 맺는 백성이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이 비유에서 주인이 보낸 종과 아들을 죽인 불의한 농부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가리킨다. 한편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이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을이방인들을 포함 가리킨다. 구원은 누구에게도 열려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열매 맺는 백성이어야 한다. 그들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농부”21:41다.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2.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 vs.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앞서 15~20절이 비유였다면 21~27절은 좋은 열매 맺는 나무가 어떤 것인지 보다 현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21절 말씀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대비되고 있다. 첫째 인물은 예수님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다. 둘째 인물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다. 예수님은 첫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하신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그렇게 부른다. 따라서 이들은 신자다. 그런데 왜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22~23절을 읽어보면 ‘주여 주여 하는 자’는 그저 말로만 주님을 부르는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2~23절은 마지막 심판날22절의 “그날에”와 23절의 “그 때에”에 있게 될 일을 예수님이 경고하고 계신 내용이다. 여기에는 예수님께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앞서 21절에 등장한 ‘주여 주여 하는 자’와 동일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신자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일들예언, 귀신축출, 많은 권능=이적을 행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말할 때마다 ‘주의 이름’ 행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행한 일의 명분 혹은 능력의 근거를 주님에게 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한마디로 능력과 열심을 갖춘 신자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날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23절 ‘밝히 말하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엄숙히 선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법적으로 철회될 수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지금의 분위기는 매우 비장하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행한 저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신다. 지금까지 나는 너희들을 안 적이 없다. 너희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이런 선언인 것이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상상해보라.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들을 한 그들이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은 자들이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이제까지 나는 너희들을 안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다음 말씀은 더욱 놀랍다. 예수님은 이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이 행한 것이 무엇인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고, 많은 이적을 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이 행한 모든 것이 불법이라고 규정하신다. 여기서 ‘불법’이란 법에 어긋난 행동이란 뜻이라기보다는 ‘악한 행동’이란 뜻이요, 문맥상 2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게서 떠나가라!” 더더구나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그 날에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22절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왜 예언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많은 이적을 행하는 것이 불법을 행하는 것인가?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내셨고,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던가? 예언도 하지 않으셨던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지 않으셨던가?마 10:1.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충실히 따른 사람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절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읽어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21절에는 ‘주여 주여 말하는 자’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대비되고 있고, 후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22~23절에 등장하는 자들은 전자에 속한다. 이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예언하며, 귀신을 내쫓고, 이적을 행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15절에서 예수님이 경고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3. 하나님의 뜻: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너희의 의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의 맥락에서 그것은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아무리 예언을 하고, 귀신을 내쫓고, 이적을 행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가족과 동료 교인들을 여전히 미워하고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여기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는데,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못할 때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

마태복음에는 ‘의’라는 말이 7번 나온다3:15; 5:6, 10, 20; 6:1, 33; 21:32. 이 가운데서 산상수훈에서만 5회 사용되고 있어, 산상수훈의 주요 주제가 ‘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의’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한 순종을 뜻한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셨고, 이에 순종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례를 받아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세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의 하나이지만, 세례를 받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나머지 모든 의를 이루는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다.

마태복음에서 ‘의’는 특별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참정신을 가르쳐주신 진정한 교사이다. 특히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자들은 실천해야 한다. 즉 마태복음에서 ‘의’는 온전하신 하늘 아버지를 닮아가고자 하는Imitatio Dei 결단과 행위로서 교사 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5:20의 ‘너희 의’ 역시 이런 시각에서 볼 수 있다.

21~48절과 관련하여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너희 의’란 6가지 반제의 행함이다. 옛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라면 6가지 반제의 행함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며, 48절에서 말하고 있는 온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단순히 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산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고 조롱하지 않고,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너희 의,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의인 것이다.

이웃은 사랑하지만 원수는 미워한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의다. 특히 원수 사랑이야말로 6가지 반제를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뜻의 절정이요 ‘너희 의’와 ‘온전함’의 핵심이다. 이러한 ‘너희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요 회칠한 무덤으로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는 자들이었다23:23. 그들은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23:25 차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너희 의’는 철저히 계명의 본래적인 뜻을 내면화하여, 전인격적으로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의다. 이 같은 ‘너희 의’를 이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반드시 성취해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언이나 귀신 축출이나 이적 행사처럼 남들의 이목을 한순간에 휘어잡을 수 있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다. 비록 남이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 인격을 다듬어가며, 말씀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가 될 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비유’마 25:31~46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 하나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 그 사람이 주릴 때에 지나치지 않고 먹을 것을 주면, 목마를 때에 냉수 한 잔 주면 주님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신다. 그래서 바울도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4.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다음에 나오는 24~27절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24~27절에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나의 이 말”24절을 듣고 행하는 자다. ‘나의 이 말’이란 예수님이 5장부터 7장까지 하신 말씀을 말한다. 즉 산상수훈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자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신다. 다른 한 사람은 그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특히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5~7장은 단지 듣거나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좋은 말씀이라고 감탄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25, 27절에 나오는 비와 창수=홍수는 최후의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다. 만약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홍수가 나면 완전히 무너져 버리듯이 최후의 심판 때에 이들은 철저히 무너질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기름’(마 25:1~13)

1. ‘열 처녀 비유’의 문맥

마태복음 24~25장은 예수님이 종말과 심판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전 멸망에 관하여, 또 종말에 있을 징조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24:3 예수님이 답하신 긴 답변24:4~25:46이다. 24~25장에 걸쳐 나오는 예수님의 답변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난리와 전쟁과 기근과 지진, 박해, 천체의 격변 등과 같은 종말의 징조에 관한 내용과 인자가 재림할 때의 모습에 관한 것이다24:4~31. 둘째는 종말을 대비하라는 교훈으로서, 다음과 같이 모두 8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24:32~25:46.

먼저 ‘무화과 나무의 비유’24:32~35는 시대의 징조를 잘 구분하여 종말이 가까운 것을 깨달으라는 교훈이다. ‘노아의 때의 비유’24:36~39는 종말의 때는 아무로 모르며, 노아의 홍수가 갑작스럽게 임한 것처럼 종말도 그러할 것을 말하고 있다.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데려가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질 것이라는 경고는 종말에 사람의 운명이 판이하게 갈라지게 될 것을 확연한 이분법적 대조로 보여줌으로써, 데려감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을 촉구하는 비유다24:40~41. ‘도둑의 비유’24:42~44는 ‘노아의 때의 비유’처럼 종말이 언제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지만44절,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기에 그치지 않고, 깨어있을 것42, 43절과 예비하고 있을 것44절을 강조한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비유’24:45~51는 믿는 성도가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말고, 성도들이 마땅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 경우 주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맡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착각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단지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고,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필자는 이 세 가지 비유 가운데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를 고찰하고자 한다.

2. 기름의 의미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그룹이다: 신랑, 슬기로운 처녀, 미련한 처녀. 여기서 신랑은 재림하실 인자 예수님을, 10명의 처녀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를 가리킨다.10 열 처녀의 비유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는 것은 기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많은 해석이 있어왔는데 대표적으로는 믿음, 은혜, 성령 등이 있다. 블룸버그는 이런 해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구매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1 그는 기름을 각 개인의 영적인 준비됨으로 해석한다.12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개인의 영적인 준비는 구매될 수 있는 것인가? 그의 견해대로 여기서 기름이 영적인 준비를 가리킨다고 필자 역시 생각하지만, 믿음이나 성령이 구매될 수 없는 것이기에 기름을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는 그의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으로부터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해석은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기름은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되, 선행을 행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대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먼저 성경외적인 근거로서, 랍비 문헌 Numbers Rabba 13:15~16에 따르면 율법연구는 반드시 ‘기름’과 혼합되어야 한다. 이 때 기름은 선행을 의미한다. 또 Qoheleth Rabba 9:8§ 1은 전도서 9:8“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에 나오는 하얀 의복과 기름을 선행으로 해석하고 있다.13

2) 기름은 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빛은 선행마 5:16의 메타포다. 여기서 선행이란 그저 착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명령마 5:17~48을 지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루는 삶마 5:20을 말한다.

3)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마태복음 7:21~27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문이 닫힌 후에 신랑에게 “주여 주여”라고 부른 것은 마태복음 7: 21~22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날에, 즉 마지막 심판날에 예수님에게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둘째, 신랑이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도 “주여 주여” 말하는 자들과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7:23고 말하였다. 셋째, 10명의 처녀가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구분된 것처럼, 7:24 이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구분하였다. 이상을 도표로 나타내자면 아래와 같다.

7:21~23 및 반석/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 열처녀의 비유

지혜로운 자 ↔ 어리석은 자 슬기로운 처녀 ↔ 미련한 처녀

주여 주여(7:21~22) 주여 주여(25:11)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행하는 사람과 행치 않는 사람 준비할 것을 준비한 처녀와 준비하지 않은 처녀

이와 같은 유사성은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서를 제공해준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7: 21~22은 그저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말한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란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율법5~7장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자7:24~27이다. 그렇다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우리는 또한 열 처녀의 비유와 결혼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의 비유마 22:11~14 사이에도 유사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후자는 왕이 베푼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응답해야 할 뿐만 아니라즉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 선포에 응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초대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한다. 여기서 예복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말한다.14 열 처녀의 비유는 결혼잔치 비유와 마찬가지로 결혼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 결혼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었던, 그렇지 않던 잔치에 온 이들은 일단 왕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 즉 믿는 성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예복을 입은 사람과 입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되고, 입지 않은 사람은 종말론적 형벌을 받게 된다22:13. 열 처녀의 비유 역시 10명의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 즉 성도이다. 또 이 성도는 다시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로 구분되고, 미련한 처녀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종말론적 형벌을 받게 된다. 이렇게 두 비유는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은 결혼잔치의 비유에 나오는 예복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제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가리킨다.

3. 메시지

열 처녀의 비유는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현실에서 재림을 의심하지 말고, 재림에 대비하여 깨어 있어야 함13절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13절의 ‘깨어있으라’grhgorevw는 문자적으로 “깨어있다”stay awake를 의미하지 않는다. 슬기로운 5명의 처녀들도 깨어 있지 못했지 않은가?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준비하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15 그러나 깨어 있다는 것, 준비한다는 것은 그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다. 재림이 있다고 믿지만, 그러나 동시에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여 늘 빛을 발하는 삶을 사는 것, 즉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에 빛을 발하는 삶, 예수님이 주신 명령을 온전히 지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해지는 삶마 5:48을 사는 것이다. 24:42 이하에서도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를 것을 알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을 뜻한다.

재림이 있기 전까지의 삶은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 시기다.16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을 알았을 때,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기름을 보충하러 갔어야 했다. 적어도 그 때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랑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 때서야 비로소 기름을 얻고자 했다. 시간이 있을 때 준비하라! 이것이 이 비유의 메시지다.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종말이 닥치면 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된다. 미련한 처녀 5명이 아무리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어도 돌아온 것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이 비유는 ‘믿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며, 성도들은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로 구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자는 “예비하였던 자들”aiJ e{toimoi. 10절. 24:44 참조, 즉 선행을 행하는 삶으로써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였던 자였다. 이들은 집안에 들어가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반면에 미련한 처녀들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여 “문 밖에 남은 처녀들”aiJ loipai; parqevnoi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처녀가 지혜로운 처녀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으며2, 3, 8절, 이들의 잘못과 그로 인한 운명이 부각되고 있음은 이 비유가 경고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란트 비유’도 착하고 충성된 종보다는 악하고 게으른 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실 예수님은 마태복음 곳곳에서 성도라고 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자가 당할 운명에 대해 경고해왔다7:15~23; 13:24~30, 36~43, 47~50; 18:21~35; 22:1~14. 이제 수난을 당하기 전 마지막 강화24~25장에서 예수님은 종말을 잘 대비하지 못할 경우 성도가 영원 형벌에 처해질 것임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브루너의 다음과 같은 말은 새겨볼 만하다: “지옥은 불신자들에게 겁주려고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신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만들어낸 교리이다.”17 이런 점에서 볼 때 보좌에 앉은 왕이요 심판주인 인자가 25장을 마감하면서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25:46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결론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하늘만 쳐다본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던 제자들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행 1:10~11 참조. 예수님이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에 힘써야 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믿는 이가 중간기에 해야 할 일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 즉 선교였다.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태 역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지만마 28:19~20, 그는 성도들이 종말에 당할 운명을 극명하게 대조함으로써 주님의 재림을 깨어 예비하는 삶을 촉구하고 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그 날이 올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세상에 빛을 비추는 제자의 삶을,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부터.

1. 누가와는 달리 마태는 이들을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3:7)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에서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서도 ‘독사의 자식들’로 비판받는다(12:34; 23:33).

2. 요한복음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나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은 ‘우리의 아비’이며 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느냐고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혈통적인 면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비판한다(요 8:33-47 참조). 바울 역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그것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갈 3:29). 이것은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이어받을 것임을 뜻한다.

3. 아마도 유월절과 같은 절기가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와 드린 제사일 것이다. Darrell L. Bock, Luke, Vol. 2, 1204 참조.

4. John R. Donahue, “Tax Collector,” Anchor Bible Dictionary 6:337 참조.

5. Joseph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Anchor Bible Commentary 28 (New York: Doubleday, 1981), 471; Darrell L. Bock, Luke, Vol. 1, 312.

6.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470-71.

7. Darrell L. Bock, Luke, Vol. 1, 313.

8. 김영봉,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서울: IVP, 2003).

9. Ulrich Luz, Matthew 1~7 A Commentary (Augsbrug Fortress, Minneapolis, 1989), 441~2 참조.

10.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영생을 위한 기름: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 연구” 「성경연구」 131권 (2005.10), 38~49를 참조하라. 여기서 논하는 ‘열 처녀의 비유’에 관한 내용은 이 글을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11. Blomberg, Matthew, The New American Commentary(Nashville, Tennessee: Broadman & Holman, 1992), 370.

12.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0), 196.

13. David E. Garland, Reading Matthew: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First Gospel (New York: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95), 241.

14. Donahue, The Gospel in Parable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88), 95~96을 참조하라.

15.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195.

16. Donahue, The Gospel in Parable, 104~5.

17. F. D. Bruner, The Christbook (Waco: Word, 1987), 306; Blomberg, Matthew, 142~43에서 재인용.

백석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장종현 목사에게 듣는 ‘백석’ 정체성 – 이기는 그에게는 흰 돌을 주리라 – 2. 백석인의 신앙(2)

회개는 생명 회복의 시작입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죄의 벌을 받는 것 말고는 달리 용서 받을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 살던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삶과 생명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결단이요 엄숙한 결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는 스스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백석인들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을 강조합니다. ‘회개용서운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서로를 용납하여 하나 됨을 추구하는 운동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도 수많은 잘못들이 있었습니다. 악한 사탄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시험에 들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버가모 교회처럼 관용이라는 미명 아래 죄와 타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즉각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빌 1:10).

베드로전서 4장 17절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먼저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백석인이라면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단지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롬 12:2).

우리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매여서도 안 됩니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석학원과 백석총회는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마중물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성령께 의지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힘차게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백석인으로서 성경을 머리로만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성경을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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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 3장 7절~14절)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 3절~7절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세례가 전하는 의미는 욕심에 이끌려 살던 옛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살겠노라는 결단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는 세례를 예표한다. 패괘한 세상은 물로 수장 되고 말씀을 준행한 노아의 방주는 물 위로 떠올라 새로운 세상이 여는 비전을 증거한다. 세례는 새로운 창조, 거듭남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 세례의 대상자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던 신앙인들이였다. 다시말해, 모세의 율법의 따라 이미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요한에게 또 세례를 받아야 했을까?> 세례요한이 말하고 있는 ‘장차 올 진노’란 미래적인 종말과 동시에 현재적인 종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미래적인 종말이란, 개인적인 죽음과 더불어 역사적 종말을 말한다. 다시말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판가름 하시는 심판의 날이다. 이러한 미래적인 종말론의 메시지는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더 의미있게 살아가라는 종말론적인 경고를 담고 있다. 이와 달리 현재적인 종말이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삶에서 만나는 ‘비가오고 창수가 나는 날’을 말한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만나는 위기, 곧 절대절명의 순간을 말한다. 유대인들이 지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몰려든 이유는 전자보다 후자의 이유가 더 강했다. 유대인들은 지금 ‘로마제국의 탄압’라는 문제를 당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모세의 율법과 규례의 준수만으로는 물질과 힘을 앞세운 로마제국의 압제 라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을 경험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로마의 압제와 같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2010년을 기준으로 자영업자들 가운데 하루에 약300명, 일년에 10만명이 파산하는 극심한 경기침체와 경제위기를 살고 있다.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살인적인 취업난을 겪는다. 하루에 42.6명, 일년에 15,56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율 1위라는 실로 전쟁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실로 ‘비가 오고 창수가 나는 날’과 같은 현실의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아무 것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것 같은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유대인들이 요한세례를 받으러 온 까닭은 지금까지 해오던 자신들의 종교생활로는 더 이상 삶에서 만나는 극심한 위기와 엄청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으로 충분했다면 이미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의 물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회복하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렇다면, 요한이 증거한 ‘세상을 이기는 새로운 믿음의 길’은 과연 무엇이 였을까? 이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와 신앙의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인가, 회심인가 누가복음은 요한이 선포한 새로운 믿음의 핵심을 한마디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증거한다. ‘죄사함’이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죄를 살인과 도둑질과 같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모세의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행위의 차원으로만 여겨왔다. 그래서, 살인과 도둑질을 안하고 율법과 규례를 준수하면 죄 없는 ‘의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세례요한의 통찰은 달랐다.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죄란 범죄행위를 넘어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이기적인 탐욕’이였다. 그래서, 비록 겉으로는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기회만 닿으면 언제든 죄를 지을 수 있는 탐욕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여겼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잠언16장 2절)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내면에 숨겨진 죄를 감춘 채 겉으로 드러난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부했다. 일명 ‘눈가리고 아웅하는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있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내면에 숨겨진 죄악의 본질을 폭로하는 일이였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세례’의 목적이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개혁을 말하지만 한걸음도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삶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회개하는 깊이 만큼 새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회개는 잘못한 행위를 고쳐서 돌이키는 차원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증거하는 회개란 ‘마음(중심)을 돌이키는 것’ 곧 회심(回心)의 차원이다. 이기적인 탐욕에 붙들려 있는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 보다 ‘회심’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하나님의 보신다고 하는 인간의 ‘중심’이란 과연 무엇인가? 중심은 내면에 숨겨진 ‘동기’와 ‘목적’을 말한다. ‘동기(motive)’란, ‘무엇이 나의 삶을 이끌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고, ‘목적(purpose)’이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따라서, ‘회심’이란 지금까지 부와 명예,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며, 세상의 자랑과 세상의 영광을 쫓던 옛 자아가 사랑과 진리, 겸손과 섬김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동기와 목적의 ‘회심’ 없이는 결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매주일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늘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례는 받았지만 그 중심(동기와 목적)이 근본적으로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술로 회개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중심은 탐욕에 붙들려 세상적인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이기심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삶인지, 아니면 진리와 사랑을 추구하는 삶인지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중심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래서, 거룩한 신앙행위나 말로 의롭다고 판단하거나 한번의 치명적인 실수로 정죄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룩한 행위를 통해서도 명예욕과 사리사욕을 채울 만큼 간사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사랑과 섬김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명예와 권세를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숨겨진 중심, 곧 동기와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마지막 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숨겨진 중심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숨겨진 본심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음을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바로 ‘비가 오고 창수가 나는 날’, 삶에서 만나는 위기의 순간에 비로소 자기도 모르던 중심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솔로몬에게 한 아이를 데리고 두 여인이 찾아 왔을 때, 그들의 눈물과 말로는 누가 진짜 어머니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죽여 둘로 나누라는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비로소 감춰진 진실과 숨겨진 본심은 드러났다. 진짜 어미는 아이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지만, 가짜 어미는 아기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라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했다. 따라서, 참된 회심의 여부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나타난다. 세례요한은 이것을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표현했다.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중심이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중심이 변화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진정으로 마음을 고쳐먹을때 행동은 달라질 수 있다. 회개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 이유는 분명하다. 중심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의 탈을 쓴 이리’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고 꾸짖는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 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과 규례를 지키며 절기와 제사를 드렸다. 이것으로 충분히 의롭기에 더 이상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이기적인 탐욕이 자신의 삶을 이끌고 있었다. 세례요한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의 정체를 ‘독사의 자식’이란 한마디로 말로 폭로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뱀은 전통적으로 사단을 의미한다.(the serpent in the Garden of Eden) 독사의 자식이란, 하나님의 자녀와 대비되는 말이다. 곧 사단의 자녀요, 세상의 자녀요, 탐욕의 자녀란 말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도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교인의 의무를 다하면 구원은 따논 당상으로 여긴다. 주일성수와 헌금생활, 교회의 직분과 봉사활동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동기와 목적이 변화되는 세례 받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기적인 탐욕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목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서 사랑과 평화, 기쁨과 감사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가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의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그들은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는 위기의 순간에도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지혜와 능력을 발휘한다. 반면에 독사의 자식들은 이기적인 탐욕으로 오류와 다툼, 미움과 절망만이 가득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0절~14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지난 2007년,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원산의 하디선교사와 길선주장로가 눈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교회는 대규모집회를 열어 너나 할 것 없이 회개를 쏟아냈다. 그 무렵 감리교회도 부산에서 영남선교대회를 열어 회개의 대열에 동참했다. 이날 감리교회 최고의 지도자 신경하감독회장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삼만여명 감리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인 회개를 선언했다. “저 역시 돈을 주고 표를 매수하는 감리교회의 선거풍토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실로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회개는 단순한 ‘립써비스’일 뿐이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진심어린 회개였다면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거나, 새로운 선거풍토를 위한 제도를 마련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분을 비롯한 모든 감리교회의 공동체는 입술의 회개는 있었지만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맺지 않았다. 겉으로는 회개를 말했지만 여전히 중심은 명예욕, 권력욕, 물욕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감리교회의 감독선거는 금권타락선거로 더욱 혼탁해져서 마침내 120년 선교역사에 먹칠을 하며 4년간 감독회장을 선출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남 얘기 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원한다면,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 물었다.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세례요한의 답변은 아주 심플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하나를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 군인들과 세리들은 권력을 남용하지 마라. 이것은 구약 레위기의 말씀으로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이였다. 무엇보다, 여러가지 복잡한 요구가 아니라 오직 단 한 가지 뿐이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다. 많은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이다. 네가 믿는대로, 네가 고백한 대로, 네가 배운대로 실천하라. 네가 말한대로 행동하라. 한마디로 ‘말씀을 적용하라’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세례요한을 통해서 분명하게 증거하신다. 너희가 듣고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며 살아가라. 작은 일부터 구체적으로 실천하라. 끊임없이 계속하라. 온전하게 변화될 때 까지…

독사의 자식들과 하나님의 아들 21절~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은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풀었던 세례의 마지막 부분에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한다. 세례가 행해지는 장소는 ‘요단강’이요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세례요한’이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세례를 베푼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기록하고 있다.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 ‘사단의 자녀들아’, ‘세상의 자녀들아’라고 비판했지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복음은 ‘독사의 자식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요단강에서 펼쳐지는 세례를 통해서 아주 드라마틱 하게 대비 시키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동일한 시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기적인 탐욕을 쫓아 ‘독사의 자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아들’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삶의 위기의 순간에 확실하게 드러나서 만천하에 공개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누가복음은 바로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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