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를 한자리로 모은 것은 교육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에 대한 봉사를 가장 소중한 소임 중의 하나로 생각하며 이 숭고한 일에 확신을 가지고 임해왔습니다.”
“저는 16세기 사상가 미셸 몽테뉴가 ‘가득 채운 머리보다 잘 형성된 머리가 낫다’라고 한 말을 늘 새기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목표로 삼아 왔습니다. 기계적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살필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비에르 국제학교 이사장 엘렌 르브렝 수녀. ⓒ프레시안(최형락)
“저는 어려서부터 늘 어딘가 다른 곳, 문화도 다르고 언어와 음식도 전혀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가졌어요. 그런 꿈이 결국 이뤄진 거죠. 한국에서요!”
“그때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폭력에 빠져 있으면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다, 폭력을 통한 혁명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라고 했지요. 그때 대학 교정에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지요.”
ⓒ프레시안(최형락)
“외국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까웠어요. 또 제가 충격 받은 것은 기러기 아빠들이었어요. 아이들을 조기 유학 보내고 아이들 때문에 부부도 떨어져 산다는 사실이 정말 가슴 아팠어요. 가정이 해체되는 것이지요. 아이들을 멀리 보내지 않고 원하는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학교를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해 놓은 교육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장미를 백합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 장미는 결국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화분에 어떤 식물을 키우겠다고 다짐하는 것보다는 그저 충분한 영양의 흙을 계속 제공해주는 게 우리의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재학생 중에 일부 자격이 미흡한 아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교육 이념에 충실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입학금이나 그런 경제적인 이유는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수도회의 종교적 정신과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학교를 만들고자 했을 당시의 법은 지금하고 달랐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바뀌면서 지금에 이르렀는데, 처음엔 합법적인 것이 지금은 불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프레시안(최형락)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학생들을 진·선·미를 추구하는 데로 인도해야하는 게 교사의 역할입니다. 인간의 위대성은 항상 자기보다 더 원대한 그 무엇에로 개방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바탕으로 한 참된 소유를 위해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사람, 남에게 열려있으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지닌 책임감 있는 사람,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생활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 이런 인재를 키우고 싶어요.”
“중세 작가인 프랑수아 라블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심이 없는 학문은 인간성을 파괴할 뿐이다.’ 지금 한국의 학생들은 지식 습득에 온갖 열성을 다하는 데, 공부를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실현만을 위한 지식의 축적이라면 오히려 자기를 축소시키는 것이지요.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우리는 배우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국의 건국 이념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인데, 이에 역행하는 것이라면 다시 생각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의 교육 이념은 바로 홍익인간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학교 뒤로 북한산 봉우리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자리한 하비에르 국제학교의 오후는 한가로웠다. 막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데리러 올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엘렌 르브렝 수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가, 그가 30여 년 넘게 이 땅에서 길러온 보석들이다. 르브렝 수녀는 하비에르 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얼마 전 5월말 어느 저녁 주한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르브렝 수녀를 축하하는 작은 모임이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훈식이었다. 주인공 르브렝 수녀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겹겹의 꽃다발을 받아 안고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관심과 칭찬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 같았다.이번 훈장은 그간 르브렝 수녀가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 교류와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을 기리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33년간 지내오면서 해온 일이다.그날 프랑스 대사의 축하 연설에 이어 르브렝 수녀가 한 인사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그의 말 그대로 르브렝 수녀의 삶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오로지 교육 현장에서 뿌리내려 있었다.르브렝 수녀는 큰 키에 금발이 아름다운 40대 초반이었던 1980년, 한국의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 직으로 초대받아 왔다. 프랑스에서도 이미 그는 자신이 속한 사도회 소속 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있던 터였다. 르브렝 수녀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서원한 후 아프리카로 파견될 것을 원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교육 사업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고 했지만 뜻하지 않게 그의 행선지는 한국이었다.르브렝 수녀는 프랑스 중부 지방 브루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외과 의사인 아버지 덕분에 집안은 경제적으로도 풍족했고, 자상한 어머니와 10명이나 되는 형제들로 늘 화목한 분위기였다. 북적대는 가운데 여덟 번째로 자라면서 그는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잘 지켜볼 수 있었다.활달한 성격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좀처럼 굽힘이 없는 고집 센 소녀였던 그에게 특히 아버지의 가르침은 그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병원에 심한 화상을 입고 장기 입원한 어린 소녀 환자에게 친구가 되어주면 어떻겠느냐고 어린 딸에게 부탁하였다. ‘그때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어렸지만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어른이 된 그는 회상한다.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어 가장 불쌍한 사람인 나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작정했지만, 18세에 사도회에 입회하면서 그 마음이 달라졌다. 그가 서원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는 교육 사업에 사명을 가진 수도회였다. 학문과 신앙의 일치를 주창한 설립자 다니엘루 수녀도 철학 박사였다.르브렝 수녀는 교육자가 되어 많은 이들이 더 좋은 뜻을 품도록 가르치는 일이 어쩌면 더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하였다. 아주 뛰어난 학생이었던 그는 25세에 교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곧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파리 교구의 교구장 뤼스티제 추기경이 하비에르 사도회 총장 수녀에게 특별한 당부를 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대학에 지도 수녀를 파견하라는 명이었다. 1969년 르브렝 수녀가 파리 10대학 낭테르 대학 현장으로 파견되었다.유럽을 뒤흔든 ’68 혁명’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때부터 수년간 르브렝 수녀는 이 대학의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의 지도 수녀로 일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지도 신부’가 그 일을 맡았었다. 르브렝 수녀가 최초의 ‘지도 수녀’가 된 것이다. 낭테르 대학의 이 경험은 훗날 한국에서 대학생을 가르치는 그의 삶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그 최루탄 냄새는 한국에서도 역시 익숙한 것이 되었다. 르브렝 수녀가 한국에 도착한 1980년, 전국의 대학가는 비상 계엄령으로 휴교 상태였다. 애초 그는 대구의 한 가톨릭계 대학교에서 불어와 불문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다. 하지만 보수적인 지역에서 르브렝 ‘수녀’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망설이던 발길은 결국 서울로 향하게 되어 고려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대학 당국이 학생들이 자유와 진리에 대해서 제대로 말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프랑스 교수’에게 배움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봉주르, 위, 싸바’만 되풀이해서 가르치는 교양 불어 수업은 르브렝 수녀 역시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배움의 통로는 다양했고 그 흐름은 자유롭고 힘찼다. 당시 그에게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학생들은 지금도 그를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꼽고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으로 ‘르브렝 교수’를 기억한다.르브렝 수녀는 그 후 서강대학교에서 정년까지 재직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고 또 한국 교육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된 세월이었다. 그리고 곧장 그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학교를 만들자!’ 그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02년 르브렝 수녀는 하비에르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시작은 미미했다. 서울 혜화동에서 작은 가정집 규모로 학교를 설립했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외국인학교 인가를 받은 것이었지만 결코 크지 않은 소박한 학교에 아이를 보내려는 학부형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시작한 하비에르 학교가 벌써 개교 11년째를 맞이하였고 80여 명의 졸업생을 냈다.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2005년 현재 위치인 구기동에 제대로 모습을 갖춘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지금 200여 명의 재학생을 둔 하비에르 학교는 프랑스식 교육방식으로 초·중등 교육을 하고 있다.흔히 국제학교라고 하는 단어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 자녀를 위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르브렝 수녀는 ‘외국인’을 위한 학교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실은 ‘한국’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 설립 당시 교육법상으로는 ‘국제학교’라는 방식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일단 규정에 맞는 대로 학교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족적’인 국제학교와는 거리가 먼 학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만나본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을 하루라도 빨리 학교 안으로 데려와 키우고 싶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많은 이들을 만나보고 나서였다.하비에르 학교를 시작하면서 르브렝 수녀는 본격적으로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교육’을 시작할수 있게 되었다.자신은 학교 다닐 때 ‘교사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아이’였다고 고백하며 웃는 르브렝 수녀는 시키는 대로 하기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찾아내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한국에서 아이들은 대학 입시를 바라보느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으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찾아내고 알아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그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오면서 한국 젊은이들의 지적인 활동에 대한 열성과 대단한 암기력에 감탄을 하게 되었다며, 그런 ‘훌륭한 수단’을 통해서 궁극의 목적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그런데 르브렝 수녀가 신념을 가지고 펼쳐오던 교육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닥쳤다. 하비에르 학교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최근 불거진 ‘국제학교 문제’ 때문이다. 국제학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 하비에르 학교도 제도적으로는 그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설립 목적이 철두철미한 교육관에 바탕을 두었던 하비에르 학교는 그 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문명숙 교감은 말한다.문 교감은 역시 사도회 소속으로 하비에르 학교를 설립할 때부터 지금까지 르브렝 수녀와 동고동락하며 학교 발전에 애를 써오는 이다. 문 교감은 이번 조사 과정에서, 특정 직업군의 부모를 둔 재학생 수를 공개하라는 식의 외부 요구가 있었다며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고 안타까워했다.형제들 가운데 큰 아이는 입학 자격이 되어 다니지만 막내는 안 될 경우가 있을 때엔 그 아이도 받아들였다. 외국에서는 이런 경우가 얼마든지 허용되는 사항이다. 또 외국에 살다가 부모의 이혼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아이 역시 받아 주었다. 학교 적응이나 아이의 정서문제로 볼 때 마땅히 갈 수 있는 학교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교육적 고려가 앞섰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이고 싶은 사실이 있다.흔히 국제학교는 무조건 귀족 학교라는 좋지 않은 이름을 달기 쉬운데, 하비에르 학교가 과연 이에 해당되는지 의문이다. 전체 학비로 볼 때 하비에르 학교보다 더 높은 학비를 받는 일반 학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비에르 학교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7년 내내 기숙사비까지 전액 지원해 주는 제도도 가지고 있다.최근 벌어진 일들로 인해 사도회의 수녀들은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동안 하비에르 학교가 해온 일들은 제쳐두고 한 가지 시각으로만 평가하는 잣대가 못내 서운하고 안타까운 것이다.올바른 신념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좋게 키워내고 싶지만 법과 제도적 문제에 가로막혀 어쩔 수 없게 된다면 너무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라고 고백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도밖에 없다고 르브렝 수녀는 애써 웃는다.르브렝 수녀의 전문 분야는 교육만이 아니다. 한국과 프랑스가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적인 물꼬를 제대로 트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서로 다른 나라 간의 이해와 소통이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게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최고의 작가인 박완서, 김원일 등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냈으며 지금도 그의 책상에는 번역원고가 놓여 있다.그동안 르브렝 수녀가 하비에르 학교에서 펼쳐 보이는 교육 철학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켜왔다. 여러 기관이나 단체에서 더 나은 교육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초대한다. 그때마다 늘 그는 이렇게 말한다.그는 잠시도 기계에서 떨어져 있지 않으려는 인터넷 세대, 온갖 정보에 노출된 아이들이 걱정스럽다. 그는 아이들이 이렇게 커갔으면 좋겠다고 밝힌다.르브렝 선생은 프랑스 교육사에서 널리 알려진 격언을 소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려고 했다.그는 ‘종교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옛날에 버렸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수녀이다. 혜택을 받은 사람이 남을 도와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책임이라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왔다. 그는 앞으로도 더 오래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의 대화가 이 땅에서 계속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교육법에서 국제학교라는 명칭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 용산국제학교와 서울국제학교, 하비에르국제학교 등 외국인학교가 국제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서 혼동을 가져오긴 하지만 누구든 ‘국제학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학원영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미인가 영어학교를 ‘변종국제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편집자주] IM선교회 산하 ‘국제학교’라는 IEM국제학교와 TCS국제학교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벌어지면서 이들 이른바 ‘국제학교’의 정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IM선교회는 2010년 창립한 단체로, 전국 23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방역당국 조사결과 밝혀졌다.
은 미인가 국제학교가 하나둘씩 등장해 교육계에서 주목받던 2013년, 12월호에 ‘강남 한복판 파고드는 미인가 영어학교, 그 정체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들 국제학교의 정체에 접근했다. 아래는 기사 내용 중 미인가 국제학교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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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법에 없는 ‘국제학교’란 대체 무엇일까. 외국인학교와 외국교육기관, 국제중고와는 무엇이 다를까. 서울 양재동에 있는 S국제학교에 상담을 가장해 방문했다. 상담을 맡은 담당자는 “미국 학력인증 업체에서 공식 인증을 받아 미국으로 전학도 가능하고 미국 교과서를 그대로 가르치기 때문에 유학 가지 않고도 유학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이름은 국내 외국인학교 리스트에서도, 대안학교 리스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같은 이른바 ‘국제학교’의 정체가 궁금했다. 글로벌인재 양성을 주창하는 국내 교육기관으로는 외국어고와 국제고, 외국인학교, 외국인교육기관 등으로 다양하다. 이 중 외국어고와 국제고 등 특목고를 제외한 외국인학교는 교육법상 ‘각종학교’에 속한다.
문제는 법적인 ‘외국인학교’와 ‘외국교육기관’이 아니면서 100% 영어수업을 하는 학교들이다. 법 조항에는 찾아볼 수 없는 ‘국제학교’가 대부분 이런 곳이다. 교육부가 운영하는 외국인학교 및 외국교육기관 종합안내 홈페이지(http://www.isi.go.kr)에 따르면 국내에 외국인학교는 51개 곳(표 참조)이다.
이 외국인학교들과 외국교육기관 5곳을 제외하고 국제학교, 국외학교, 인터내셔널스쿨, 칼리지 등의 이름을 달고 외국국적이나 외국체류기간 등 입학자격이 별도로 없는 영어수업 학교들은 모두 교육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학교가 아닌 ‘학원’이다.
일부 국제학교 상담자들은 상담시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외국인학교는 아니고 ‘대안학교’라고 보시면 돼요. 원래 대안학교가 학력인정은 안 되지만 재벌들도 대안학교에 보내잖아요.”
그러나 교육부가 집계한 전국 185개 미인가 대안학교 명단을 보면, 이 같은 영어수업 학교는 일산 H학교와 파주 K학교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강남이나 분당, 용인 등 지역의 국제학교들은 대부분 학원법상의 학원으로 등록하고 영업하는 것이다.
교육법에서 국제학교라는 명칭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 용산국제학교와 서울국제학교, 하비에르국제학교 등 외국인학교가 국제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서 혼동을 가져오긴 하지만 누구든 ‘국제학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학원영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미인가 영어학교를 ‘변종국제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암사동 CBIS나 분당 BIS처럼 규모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전교생이 20~30명에 불과한 영어수업 학교도 있다.
그러나 미인가 영어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들의 대다수는 법적으로 학교가 아니라는 점을 크게 문제삼지 않고 있었다. 외국인학교도 국내학력 인정이 되지 않고 국내 대학에 가려면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 점은 똑같은 만큼 정식 외국인학교와 영어학교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외국인학교가 대부분 연 학비가 3000만원 전후인데 비해 영어학교는 2000만원 전후로 비교적 저렴하다는 것도 영어학교를 찾는 이유다.
작년부터 국제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한 학부모는 “외국인학교보다 저렴하게 100% 영어수업을 받는데, 어차피 학력인정이나 검정고시 문제는 외국인학교와 똑같은 만큼 유학을 생각하고 있는 부모라면 국제학교를 계속 보내지는 않더라도 어릴 때 1~2년은 보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들 학교는 국내학력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가 갑자기 사라져도 책임질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월 150만여 원의 수업료를 받는 강남의 영어학원 유치부(세칭 영어유치원)가 경영난 또는 원장 개인사정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또 원어민 교사의 자질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실제로 최근 서초동에 위치한 한 영어학교에서는 저학년 어린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도 원어민 교사가 무시하며 면박을 주었고, 아이가 교실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학부모들이 단체로 항의에 나선 일도 있었다.
전교생 30여명 작은 국제학교도
외국인학교 입학비리 단속이 심해지면서 학부모들이 자녀 영어교육을 위해 미인가 국제학교를 찾는 경우도 많아졌다.
외국인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는 한 취재원은 “강남 빌딩이나 주택에서 20~30여 명 모아 놓고 미국학교 과정 1~3학년을 가르친다는 학교도 봤다”고 말했다.
취재원이 말한 ‘20~30여 명 다니는 학교’를 수소문해 논현동의 한 ‘인터내셔널 스쿨’에 아이를 보낸다는 학부모 A씨를 만났다.
—학교의 커리큘럼과 학생 수는 어떻게 됩니까.
“계속 아이들이 들어오고 있어서 정확한 인원은 제가 잘 모르겠고요. 원어민 교사가 미국 교과서로 미국 정규교육 과정과 똑같이 가르쳐요. 지금은 문을 연 지 얼마 안돼서 초등 1~3학년밖에 없지만 다니는 아이들이 자라면 학년도 늘어나겠지요.”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아이가 12월생이라 그런지 덩치가 작고 성격이 예민해서 한 반에 40여 명이나 되는 동네 공립초등학교에 보내기가 불안했어요.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려 했는데 추첨에서 떨어졌고요. 아이가 다니던 영어유치원 원장님이 영어로 수업하는 대안학교를 설립한다고 해서 유학을 보내지 않고도 100% 영어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에 동의하는 유치원 학부모들 몇 명이 함께 이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한국 아이들만 다닐 텐데 영어가 많이 느나요.
“국내 외국인학교에 가 봐도 진짜 외국인은 별로 없잖아요. 대부분 외국에서 태어나서 국적만 있거나 3년 이상 살다 온 한국인들이죠. 공립학교를 가면 영어유치원 3년 다닌 실력이 다 제자리가 된다고 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영어를 생각하면 아이를 데리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유학을 가고 싶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러기아빠를 만들기도 어렵고요. 그런데 ‘(영어유치원)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을 완벽하게 케어해 주는 국제학교를 설립한다고 해서 들어오게 됐습니다.”
—학교가 빌딩 한 층을 사용한다던데, 학교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영어유치원들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공립학교나 일반유치원이라고 해서 다 운동장이 큰 것도 아니고요. 학교 내부는 아이들이 좋아하게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고 짐(gym:체육관)도 있고 현장학습도 자주 가니까 그런 불만은 없어요.”
—그 외에 일반 공립초와 다른 점은요.
“수업료가 있고 학부모 참여가 많다는 점이겠지요. 다른 대안학교도 대부분 그렇다고 하더군요.”
—미인가 학교임을 알면서도 보내고 있는데, 정규교육에서 멀어지는 점이 불안하지는 않습니까.
“재벌이나 연예인들도 대안학교를 보내잖아요. 아이가 행복하게 다닐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어차피 마음이 바뀌더라도 초등학교 때는 어렵지 않게 편입할 수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요.”
물론 A씨가 자녀를 보낸다는 이 학교의 이름은 서울시교육청이 집계한 대안학교 리스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영어와 기타 私교육 ‘두 마리 토끼’?
경기도의 한 ‘국제학교’는 학원으로 등록 후 국제학교라는 명칭을 사용, 경기도교육청의 적발로 1주일간 교습정지 처분을 받았다.
취재를 계속하다 보니 학부모들이 정체도 불분명한 국제학교나 국외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이유가 단순히 영어교육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국제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 B씨를 만났다. 아이가 해당 학교의 유치부를 졸업하던 시점 사립초와 공립초, 수도권 국제학교 등을 고려하다 결국 같은 학교로 진학시켰다고 한다.
—처음부터 아이를 국외학교에 보내고자 했습니까.
“원래 초등 2학년 때쯤 2~3년 아이만 데리고 미국에 가려고 했었어요. 최적의 유학 시기가 예전에는 초등 고학년 때라고 했지만 점점 어려지더라고요. 4학년 이후 귀국하면 다른 과목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해서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어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하던 여러 가지 사교육을 포기하기는 좀 망설여졌습니다.”
—유학을 포기하고 국외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기유학을 가면 영어는 잡을지 몰라도 수학이나 논술을 놓치게 되잖아요. 초등 고학년이 되면 과목 수가 늘어나는데 아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대치동에서 잘나가는 수학이나 논술학원에 계속 다닌 애들과 경쟁을 할 수 있겠어요? 국제학교는 영어로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 외 사교육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공립 다니는 아이들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거 아니잖아요. 학원 가서 다 배우는 거지. 2학년이면 영어를 웬만큼 마치고 3학년 되면서 사회와 과학, 역사 같은 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는데 그때 해외에 계속 머무른다는 것도 좀 걱정되더라고요.”
—국내 정규교육 과정을 포기한다는 점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유학가 있는 애들은 전부 한국인이면서 한국 정규교육 못 받으니 문제가 되는 건가요? 학교에서 역사나 수학도 다 배워요. 한국사 수업도 가끔 해 주고요. 중국어 시간도 있어요. 캐나다 정규교육을 영어로 받으면서 다른 사교육도 시킬 수 있으니 유학과 대치동교육의 장점만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성업 중인 국외학교와 변종국제학교들은 B씨와 같은 학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에 기대를 갖고 있다. 미국학교 생활을 체험하면서 기러기 생활은 안 해도 되니 부모와의 유대관계도 유지할 수 있고, 방과후나 주말을 이용해 한국식 사교육도 모두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업수준 학부모 기대에 못 미치기도
그러나 학원으로 등록된 대부분의 변종국제학교는 한국 학생이 100%인 만큼 기대만큼의 영어습득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많다. 강남 소재 한 국제학교에서 아이를 공립학교로 편입시킨 학부모 C씨는 “수업이 마음에 안 차 전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C씨의 얘기다. “아이가 영어유치원을 3년 다니면서 미국 교과서 3학년 과정까지 끝냈는데 국외학교 1학년에 들어가니 정규과정이라며 알파벳부터 배우는 거예요. 기가 막혔지만 처음에 그러다 점점 진도가 빨라지겠지 생각했는데 1학년 2학기가 돼도 여전히 너무 쉬운 챕터북들만 읽고 있는 거죠. 아이는 오히려 신이 났어요. 영어수업은 너무 쉽고 친구들하고는 한국말만 하고 노니까요. 학비가 연간 2000만원이 넘는데 차라리 좋은 영어학원 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같은 유치원 친구들은 동네 공립초등학교에 다니면서도 ‘빅3 영어학원’ 시험을 보러 간다고 난리인데 영어도 안 늘고 다른 과목도 놓치겠다 싶어서 포기했어요.”
영어로 수업하는 5~7세 대상 유아교육기관이 처음 생겨나던 10여 년 전 교육부와 유치원 관계자들은 “법적으로 영어유치원이란 말은 있을 수 없고 영어학원 유치부일 뿐”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미인가 유아교육기관은 철저히 단속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별다른 단속도 이뤄지지 않았고 일반유치원과 어린이집 부족현상이 계속되면서 어느새 강남 일대에서 ‘영어유치원’은 유아교육의 대세가 되고 있다.
정부가 영어교육이나 미인가 교육기관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미인가 영어학교도 어느새 ‘국제학교’로 유야무야 정식 교육기관처럼 영업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과거를 알 수 없는 원어민교사 자질문제와 갑작스런 학교폐쇄 등 피해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 있다. “미인가 교육기관에 보낸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