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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金憲昌─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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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金憲昌─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금의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熊津城)이 함락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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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熊津城)이 함락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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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金憲昌─亂)
김헌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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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계보[편집]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김헌창의 난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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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과 신라군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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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출판사 :: 티칭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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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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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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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귀족 김헌창의 좌절: 온실속 화초는 잡초에 진다 | 경영일반 | D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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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金憲昌─亂)
이러한 김헌창의 반란은 자연히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다른 방계(傍系) 김씨 왕족인 김경신 일파 사이의 제1차 대결이 있은 지 37년 뒤에 제2차 대결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난은 그 같은 양 세력의 충돌이었던 만큼, 전국을 휩쓰는 일대의 내란으로 전개되었다.
주 05)·완산주(完山州)주 07)·청주·주 08)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주 09)·서원경(西原京)주 10)·금관경(金官京)주 11)의 사신[仕臣: 소경(小京)의 장관]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이 삽시간에 장악된 것은 이들 지역에 반란 세력과 내통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武珍州) ·청주· 사벌주(沙伐州)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國原京) 의 사신[仕臣: 소경(小京)의 장관]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이 삽시간에 장악된 것은 이들 지역에 반란 세력과 내통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주에서는 도독 향영(向榮)이 추화군(推火郡)으로 비상 탈출을 했는데, 이 같이 반란 세력에 동조하지 않은 부류들은 피신하거나 탈출해 중앙 정부에 반란이 발생했음을 고하였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은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 주에 이르렀는데, 이는 충청도의 거의 전 지역과 경상도의 서부와 남부 및 전라도의 전주와 광주까지 포괄하는 범위로 수도인 서라벌을 포위하고 있었다.
주 12)추화군(推火郡)주 13)의 경우는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반란 세력에 휩쓸리지 않은 공으로 7년간 조세를 면제받았을 정도였다. 초기 반란 세력의 기세는 인근 일대까지도 압도했는데, 삽량주(歃良州) 추화군(推火郡) 굴자현(屈自縣) 의 경우는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반란 세력에 휩쓸리지 않은 공으로 7년간 조세를 면제받았을 정도였다.
이처럼 김헌창의 난은 반란의 중심 거점이 웅천주라는 지방이었지만,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과 중앙 왕실에 동조하는 양대 세력으로 신라 전체가 양분되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대규모의 내란이 되었다.
중앙 정부는 난이 일어나자 우선 원장(員將) 8명을 보내 왕도(王都)의 8방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 다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계속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一吉飡)장웅(張雄)이 선발대로 가고 잡찬(迊湌)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제릉(悌凌)이 뒤따라갔으며, 이찬(伊飡)균정(均貞), 잡찬웅원(雄元), 대아찬(大阿飡)우징(祐徵) 등이 주력 부대인 3군을 맡아 정벌하러 갔다.
그리고 각간(角干)충공(忠恭)과 잡찬윤응(允應)은 문화관문(文火關門)을 지키게 하였다. 이 밖에도 2명의 화랑이 낭도들을 이끌고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원성왕 직계 후손들의 결속으로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토벌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전략상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삼년산성 」(三年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 방면의 반란군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장웅의 부대에게 격파되었고, 이어 장웅의 부대와 합류한 위공·제릉의 연합군에게 삼년산성마저 함락당하자 결국 속리산에 배치된 병력까지도 섬멸당했다.
주 14)의 반란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게 패하였고, 웅진에 진을 친 반란군도 공격을 받아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난이 진압되자 반란 세력에 대한 무장 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일어났다. 그리고 왕경(王京)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성산(星山) 의 반란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게 패하였고, 웅진에 진을 친 반란군도 공격을 받아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난이 진압되자 반란 세력에 대한 무장 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일어났다.
김헌창은 참시(斬屍)되고, 이에 동조한 종족(宗族)과 도당 239명이 사형 당했다. 그러나 반란 세력에 의해 병졸로 동원된 사민(私民)이나 일반 양민은 방면·해산되었다. 또한 당시 사형을 당한 김헌창의 종족은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척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김헌창 형제의 자손과 근친은 대부분 살아남아 중앙정계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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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헌창
新羅 金憲昌 지위 장안국의 초대 국왕 재위 822년 3월 전임 초임 후임 김범문 부왕 김주원(金周元) 이름 휘 김헌창(金憲昌) 연호 경운(慶雲) 신상정보 출생일 생년 미상(生年 未詳) 출생지 ? 사망일 822년 3월 사망지 웅진(熊津) 왕조 강릉 김씨(江陵 金氏) 부친 김주원(金周元) 모친 ? 배우자 ? 자녀 김범문(金梵文) 김분(金水+分)
김헌창(金憲昌, ? ~ 822년 음력 3월)은 신라의 왕족이자 장안국의 창건자로 태종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의 아들이다. 관등은 이찬에 이르렀으며 헌덕왕 시절에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웅천주도독일 때 과거에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일을 명분 삼아 822년 음력 3월 반란을 일으키고 국원경 등을 장악, 장안국을 건국했다가 신라군에 진압되어 자살하였다.
생애 [ 편집 ]
관직 생활 [ 편집 ]
807년 정월(애장왕 8년, 이하 모두 음력)에 관등은 이찬으로서 시중이 됐다가[1] 810년(헌덕왕 2년) 전에 물러났다. 813년 정월 무진주 도독에 임명됐고 814년 8월 중앙으로 들어와 다시 시중에 올랐다가 816년 정월에 청주(菁州) 도독으로 물러났고 821년 4월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전임됐다.
반란 그리고 자살 [ 편집 ]
822년 3월 과거에 아버지인 김주원이 원성왕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했음을 이유로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했으며 4주(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3소경(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여러 군현을 복속시켰다. 청주도독 향영(向榮)은 추화군으로 도망갔고 한산주, 우두주, 삽량주, 패강진, 북원경 등은 김헌창에게 가담하지 않고 성을 지켰다.
3월 18일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 주조(州助)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수도 금성에 반란을 보고하자, 헌덕왕은 최웅과 영충에게 관직을 하사한 후 장웅(張雄)을 선발대로, 위공(衛恭)·제릉(悌凌)은 그 뒤를 잇게 하고, 김균정·김웅원(金雄元)·김우징 등이 삼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김충공과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종군을 청하기에 명기는 낭도들과 황산(黃山)으로,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가게 했다. 이에 김헌창은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한 후 삼년산성과 속리산에서, 김균정은 성산(星山)에서 김헌창의 군대를 격파한 뒤 모두 웅진성으로 진격하였다. 사세는 기울어 포위 공격 열흘 만에 김헌창은 자살하고 부하들이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 성이 함락되어 김헌창의 시체는 또 베어지고, 일가와 수뇌급 239명은 주륙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녹진에게 대아찬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에 속한 굴자군은 지리적으로 장안국과 가까웠으나 가담하지 않아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825년 정월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주에서 재차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사하였다.
계보 [ 편집 ]
아버지 : 명주군왕 김주원
어머니 : 정숙왕후박씨(貞淑王后朴氏) 형 : 김종기 형수 : 원화부인박씨(元和夫人朴氏) 동생 : 김신 아들 : 김범문(金梵文) – 825년 고달산 산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남평양(南平壤)에 정하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했지만, 북한산주도독 총명(聰明)에게 진압되어 죽었다. 아들 : 김분(金水+分)
각주 [ 편집 ]
↑ 《삼국사기》10권 신라본기 제10 애장왕 8년
참고 문헌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통일신라 절반 휩쓴 김헌창의 ‘長安國’ 조선일보 2010년 4월 3일
김헌창의 난
김헌창의 난(金憲昌―亂)
822년(신라 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이 일으킨 반란. 신라 멸엽의 정치적인 혼란기를 당하여 왕위 쟁탈을 중심으로 음모ㆍ반역ㆍ골육상쟁의 난이 그치지 않았다. 김헌창의 난도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당시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으로 있던 김헌창은 자기의 부친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이 원한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憬雲)이라 하며, 무진주(武珍州: 光州)ㆍ완산주(完山州: 全州)ㆍ청주(淸州: 晋州)ㆍ사벌주(沙伐州: 尙州)의 4도독을 위협하니, 국원(國原: 忠州)ㆍ서원(西原: 淸州)ㆍ금관(金官: 金海) 등의 관리들과 모든 군ㆍ현의 수령들이 이에 항복하였는데,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도망하여 퇴화군(堆火郡: 密陽)으로 갔으며, 한산(漢山: 廣州)ㆍ우두(牛頭)ㆍ삽량(歃良)ㆍ패강(浿江)ㆍ북원(北原: 原州) 등에서는 난이 일어난 것을 알고 수비하였다.
완산(完山: 全州) 장사(長史) 최웅(崔雄)은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의 도움으로 서울로 도망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장군 8명으로 서울을 지키게 하고, 장웅(張雄)ㆍ위공(衛恭)ㆍ제릉(悌凌)으로 헌창을 치게 하였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헌창의 군사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 報恩)을 공격한 다음 속리산(俗離山)에[서 헌창의 군을 격멸하였다. 균정(均貞)은 성산(星山)에서 승리하고 제군(諸軍)이 웅진에 모여 김헌창의 군대를 격멸시키니, 김헌창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이에 다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김헌창은 자살했다. 그 후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과 난을 일으켰으나, 이것도 실패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公州)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반란 세력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지금의 충청ㆍ전라ㆍ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熊津城)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 되어 진압되었다.
이 난은 작게는 원성왕계 귀족들과 무열왕계 귀족들 간의 제2차 왕위 계승전이었고, 크게는 신라 하대에 계속된 크고 작은 왕위 계승전들 가운데 하나였다.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왕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귀족들에게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김경신(金敬信: 元聖王)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 지방으로 물러난 사람이다.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난 뒤에, 계속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김헌창은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807년(애장왕 8)에는 시중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 중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金彦昇: 憲德王)에 버금가는 실력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 해 1월에 시중 직에서 밀려났다. 그 뒤 계속 헌덕왕파의 견제를 받아 813년(헌덕왕 5)에는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의 도독, 816년에는 청주(菁州: 지금의 晉州)의 도독이 되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821년에는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되었다.
이처럼 헌덕왕 일파의 견제를 받는 가운데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된 이듬해에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당시 김헌창이 반란의 명분을 표방한 것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귀족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왕위에 추대된 김주원이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것을 공격하는 것은, 원성왕의 즉위에 대한 합법성 및 당시의 원성왕계 왕실의 합법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거사에 대한 합리화인 동시에 과거 김주원을 지지했던 귀족 세력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명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헌창의 반란은 자연히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다른 방계 김씨 왕족인 김경신 일파 사이의 제1차 대결이 있은 지 37년 뒤에 제2차 대결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난은 그 같은 양 세력의 충돌이었던 만큼, 전국을 휩쓰는 일대의 내란으로 전개되었다.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ㆍ완산주(完山州: 지금의 全州)ㆍ청주ㆍ사벌주(沙伐州: 지금의 尙州)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國原京: 지금의 忠州)ㆍ서원경(西原京: 지금의 淸州)ㆍ금관경(金官京: 지금의 金海)의 사신(仕臣: 小京의 장관) 및 여러 군ㆍ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이 삽시간에 장악된 것은 이들 각 지역에 반란 세력과 내통한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주에서는 도독 향영(向榮)이 추화군(推火郡)으로 비상 탈출을 했는데, 이같이 반란 세력에 동조하지 않은 부류들은 피신하거나 탈출해 중앙 정부에 반란이 발생했음을 고하였다.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은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 주에 이르고, 충청도·전라도의 거의 전 지역과 경상도의 서부와 남부에 해당해 수도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처럼 김헌창의 난은 반란의 중심 거점이 웅천주라는 지방에 있었지만,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과 중앙 왕실에 동조하는 양대 세력으로 신라 전체가 양분되어 충돌한 대규모의 내란이었다.
중앙 정부는 난이 일어나자 우선 원장(員將) 8명을 보내 왕도(王都)의 8방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 다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계속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이 선발대로 가고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 제릉(悌凌)이 뒤따라갔으며, 이찬(伊飡)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이 주력 부대인 3군을 맡아 정벌하러 갔다. 그리고 각간(角干)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應)은 문화관문(文火關門)을 지키게 하였다. 이 밖에도 2명의 화랑이 낭도들을 이끌고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원성왕 직계 후손들의 결속으로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토벌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전략상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삼년산성(三年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報恩 지역) 방면의 반란군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장웅의 부대에게 격파되고, 이어 장웅의 부대와 합류한 위공·제릉의 연합군에게 삼년산성을 함락당한 뒤 속리산에 배치된 병력까지 섬멸당하였다.
그리고 왕경(王京)에 가깝게 깊숙이 자리잡았던 성산(星山: 지금의 경상북도 星州)의 반란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게 패하고, 웅진에 진을 친 반란군도 공격을 당해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난이 진압되자 반란 세력에 대한 무장 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있었다. 반란 세력의 귀족들에 의해 병졸로 동원된 그들 귀족의 사민(私民)들이나 일반 양민들은 방면, 해산되었다. 그리고 김헌창은 참시(斬屍)되고, 이에 동조한 종족(宗族)과 도당 239명이 사형당하였다. 다만, 이 때 사형을 당한 김헌창의 종족이란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척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경우, 김헌창 형제의 자손과 근친도 살아남아 그 뒤 그대로 중앙에서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많은 무열계 귀족들이 크게 몰락하였다. 즉, 반란에 가담해 많은 귀족들이 죽음을 당했고, 그 밖에도 사형은 면제되었지만 골품제에서 신분이 강등되거나 장원(莊園) 등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당한 세력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 난을 분기점으로 무열왕계는 중앙에서 활약을 하더라도 원성왕의 후손들이 주축이 된 각 귀족의 파벌에 가담하는 정도여서, 중앙 정계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서는 밀려났다.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은 이 때 피신해, 3년 뒤인 825년에 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壽神)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로써 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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