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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회] 구하라 주실 것이요 – 유기성 목사 설교 선한목자교회 금요성령집회 : 갓피플TV [공식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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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주실 것이요 . . .”에서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 바른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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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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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7절.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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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7절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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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7절.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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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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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주실 것이요 . . .”에서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9)

글을 시작하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는 불신자들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아마도 이 유명세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안에 이 말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마7:7의 예수님의 말씀은 헬라어 원문 상으로 단어 하나 다르지 않게 눅11:9에도 똑같이 기록되어있다. 그럼에도 산상수훈의 마7:7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7:7의 말씀이 눅11:9에 있는지 조차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중요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하나를 놓치고 있는 까닭은 아마도 눅11:9은 제처 놓고 산상수훈의 마7:7만 읽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구하라 주실 것이요….”의 원론적인 의미는 눅11:9과 마7:7이 동일하다. 즉 두 군데 다 예수님의 기도 명령과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각 본문 안에서의 실제적인 의미는 서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각 본문의 배경이 마7:7은 마7:1-6이며, 눅11:9은 눅11;5-8의 “떡 세 덩이의 비유”로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제부터 보통은 잘 살피지 않는 눅11:9을 눅11;5-8의 “떡 세 덩이의 비유”와의 전후문맥 속에서 살핌으로써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예수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찾아내려고 한다. 물론 마7:7이나 눅11:9을 제대로 살피려면, 전후문맥 외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므로 거지가 된 주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약속하신 “거지 구호”라는 것과 또 헬라어 원문의 “kai”(카이)를 번역 성경에서 “그러면”(and)으로 잘못 번역한 오역을 살피는 작업을 해야 하지만(필자가 검토한 번역 성경들 중에는 유독 NIV에서만 “kai.”를 “and”가 아닌 ‘세미콜론’으로 표시함으로써 원문에 가깝게 번역했다), 이 작업은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눅11:9을 중심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추적할 것이다.

본문 속으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9절)

만약 “구하라….”의 예수님의 말씀이 산상수훈(마7:7)에만 있었다면, 예수께서 하신 또 하나의 다른 중요한 기도 명령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떡 세 덩이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뒤이어 “구하라….”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이것은 누가의 의도적인 편집일 수도 있다), 이 말씀을 “떡 세 덩이의 비유”에 비추어 전후문맥 속에서 볼 수 있음으로써 마7:7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예수님의 중요한 기도의 명령 한 가지를 더 찾아낼 수 있다.

마7:7과 눅11:9에 대하여는 보통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똑같은 기도의 명령인데, 중복을 피하려는 유대인의 언어 습관에 따라,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 명령을 세 가지 다른 표현으로 제자들에게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 한 가지는 예수님이 하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기도 명령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 적극적이고 심층적으로 기도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하라”보다 “찾으라”가 더 적극적이고 심층적이며, “찾으라”보다 “두드리라”가 더욱 적극적이고 심층적인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들은 일견 일리는 있지만, 예수님의 기도 명령의 중심 의도에서는 조금 비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에서 우리가 놓친 것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명령과 기도 응답의 약속을 하시면서 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다른 표현의 말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도 명령을 하셨는가? 또 “주실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라”의 기도 응답의 약속도 왜 세 번씩이나 다른 표현의 말로 반복해서 하셨는가?

눅11:9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예수님의 기도 교훈을 발견하려면, 먼저 헬라어 원문에서 “주실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들의 “태”(능동태인가 수동태인가)가 무엇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주실 것이요”(doqh,setai u`mi/n/도데세타이 휘민/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와 “열릴 것이요”(avnoigh,setai u`mi/n/아노이게세타이 휘민/그것이 너희에게 열려질 것이다)는 ‘수동태 3인칭 단수’인데 반해 유독 “찾아낼 것이요”(eu`rh,sete/휴레세테/너희가 찾아낼 것이다)만 ‘능동태 2인칭 복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학자들은 헬라어 원문에서 “주실 것이요”와 “열릴 것이라”는 ‘수동태’인데 반해 “찾을 것이요”만 ‘능동태’인 것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이 좀 이상하다고만 여겼을 뿐(짐작컨대 이들은 저자나 필사자의 실수로 여기는 듯하다), 왜 예수님이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셨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아마도 그들은 “찾을 것이요”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안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왜 예수님이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셨는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주실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이라” 중에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쓰인 까닭은 저자나 필사자들의 ‘실수’나 ‘우연’(저자가 ‘찾을 것이요’를 수동태로 써도 되는데 아무런 의미 없이 어쩌다가 능동태로 쓴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하라…..”의 기도 명령을 한 단어도 틀리지 않게 똑같이 기록한 마태와 누가가 동시에 이런 실수를 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인 까닭은 예수께서 무엇인가 중요한 기도의 교훈을 제자들에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찾을 것이요”를 ‘능동태’로 말씀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 명령을 하시면서 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셨을까? 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이 말씀 바로 앞에 기록된 눅11:5-8의 “떡 세 덩이의 비유”와의 전후문맥 속에서 눅11:9을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예수께서 바로 전에 말씀하신 “떡 세 덩이의 비유” 안에 답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눅11:9을 원문대로 직역한 것을 보면서 “찾을 것이요”만 유독 ‘능동태’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살펴보자.

“너희는 구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너희는 찾으라. 너희가 찾아낼 것이다. 너희는 두드리라. 그것이 너희에게 열려질 것이다”(눅11:9)

-NIV/ “So I say to you: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Luke11:9)

원문대로 직역한 눅11:9을 다시 정리하면, “너희는 구하라. (너희가 구하는)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너희는 찾으라. 너희가 (찾는 그것을 너희 자신이 직접) 찾아낼 것이다. 너희는 두드리라. (너희가 두드리는) 그것(문)이 (하나님에 의해서) 열려질 것이다.”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은 기도하는 자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일이며, 기도하는 자가 두드리는 문을 열어주시는 일이다. 반면에 기도하는 자가 해야 하는 일은 ‘구하는 일’과 ‘찾는 일’과 ‘두드리는 일’과 더불어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직접 찾아내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열어주시겠지만, 너희가 찾는 것은 너희가 직접 찾아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눅11:5-8의 “떡 세 덩이의 비유” 안에서 위의 설명(눅11:9)을 관련지어 살펴보자. 아래에서 이 비유의 주인공을 “A”로 설정하겠다.

어느 날 여행 중이던 A의 친구가 한 밤중에 A의 집을 방문했다. 그래서 몹시 시장해 보이는 A의 친구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은 A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A의 집에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친구에게 대접할 새 빵이 없었다(유대인들은 손님을 대접할 때 항상 새 빵을 내어놓는다). 다시 말하면 친구가 갑자기 찾아온 한 밤중의 A의 집 형편으로는 방문한 친구를 대접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A의 집 형편이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않고 그냥 방치한다면, 그것은 유대인의 관습으로 볼 때 A의 집은 물론이고 A의 마을 전체의 명예를 더럽히는 수치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유대인들은 죽음보다 수치를 더 싫어하는 강력한 수치 문화가 있다). 만약 이 사실을 내일 아침 A의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마을 사람들은 A의 가족을 마을의 명예를 더럽힌 집으로 규정하고 마을에서 쫓아낼 것이며, 설령 그렇게 하지 않는다할지라도 A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밤중에 친구가 찾아온 A의 집은 졸지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A는 가정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이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A는 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했다. 그러고 나서 A는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갈래로 찾기 시작했다. A는 아내와도 자신의 친구에게 대접할 새 빵 세 덩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상의했다. 마침 아내가 A에게 말해주었다.

“오늘 아침에 빵 구울 때 보니까(큰 부자를 제와한 보통의 유대인들은 아침에 여러 가구가 함께 모여서 그날 먹을 빵을 함께 굽는다) 아비가일의 집에서 내일 먹을 빵까지 구웠어요. 아마 지금 가면 새 빵 세 덩이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보, 아비가일의 남편과 당신은 절친한 친구잖아요? 한 밤중이라서 좀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한 번 가보세요. 새 빵 세 덩이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A는 아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A는 방금 전에 했던 “구하라”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음을 깨달았다. A는 “구하라”의 기도 후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하게 새 빵 세 덩이를 찾았지만, 하나님은 A 자신이 새 빵 세 덩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A는 한 밤중이었지만 옆집에 사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새 빵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부탁하면 반드시 들어줄 것임을 믿고, 한 밤중이지만 용기를 내어 옆집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다. A는 친구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새 빵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한 밤중이었지만, 하나님은 A의 친구로 하여금 문을 열도록 도와주셨고, 그래서 A는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새 빵 세 덩이를 손에 들고 기쁨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A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주께서 구하면 주시겠다는 기도 응답의 약속을 굳게 믿고, 위기의 순간에 친구를 대접할 수 있도록 새 빵 세 덩이를 주께 구했다. 그리고 나는 주께서 명령하신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새 빵 세 덩이를 구할 방법을 열심히 찾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 빵 세 덩이를 구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새 빵 세 덩이를 손에 넣기 위해 새 빵이 있는 옆집 친구 집에 가서 열심히 문을 두드렸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옆집 친구의 집 대문을 열어주시고 내 손에 새 빵 세 덩이를 쥐어주실 줄 믿었다. 드디어 옆집 친구는 한 밤중이었지만 기꺼이 대문을 열고 나에게 새 빵 세 덩이를 빌려주었다. 나는 기쁨으로 집에 돌아와서 친구에게 정성껏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예수님의 기도 명령과 기도 응답의 약속대로 신실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께서 “너희가 찾으라”고 명령하시고 “너희가 찾아낼 것이요”라고 ‘능동태’로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의 과정에서 내가 행동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필자는 “구하라”를 “골방 기도”로, 그리고 “찾으라”와 “두드리라”를 “행동 기도”라고 명명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구하라”의 골방 기도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가 있다. 이런 때에는 주님이 약속하신 “주실 것이요”의 기도 응답 약속을 믿고 골방에서 기도하면 될 것이다. 주님은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방법대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약속대로 반드시 주실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구하라”의 기도와 함께 “찾으라”와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도 함께 해야 할 때가 있다(필자의 판단으로는 우리가 하는 기도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라”의 골방 기도와 함께 “찾으라”와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혹시 내가 골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우리의 기도에서 발견된다면, 이제라도 골방에서 나와서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열심히 찾아야 하며, 또 그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아냈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찾아낸 해결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기도들 중에 아직까지 응답되지 않고, 그래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면, 어쩌면 우리가 골방 기도 후에 반드시 해야 하는 행동 기도를 등한히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글을 마치며

어려운 문제들을 놓고 주님의 기도 응답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이들 중에 아직 어려운 문제들로 힘들어 하며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간절히 기다리는 지체들이 있는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면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계속 답보 상태에 있는 지체들은 없는가? 만약 있다면 혹시 나는 “구하라”의 기도는 잘 하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명령대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는 “찾으라”의 행동 기도를 등한히 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라. 만약 “찾으라”의 행동 기도에 문제가 있다면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는 불가능할 것이며, 그렇다면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는 “문 열림”의 기도 응답도 없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심각한 지경에 있는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 사태가 빨리 종식될 수 있도록 각자 골방에서, “주실 것이요”의 기도 응답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께 “구하라”의 기도를 간절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주께서 말씀하신 “찾으라”와 “두드리라”의 명령대로 우리가 해야 할 “찾으라”와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슴은 아프지만 교회가 공 예배와 여러 가지 모임들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개개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며, 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고, 정부 당국의 여러 가지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지금 당장 교회와 우리가 해야 할 “찾으라, 두드리라”의 행동 기도일 것이다.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명령하시고 약속하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기도 명령을 신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우리가 애타게 구하며 두드리는 “코로나19 종식”의 대문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열려지는 기도 응답이 빠른 시일 내에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을 믿으며 소원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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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7 ]

제 7 장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무리들이 가르치심에 놀라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중국 경청

1989년, 저는 어머니를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자주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창조하시고 인류의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설교하시던 분은 늘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께 기도 드리면 주님께선 우리를 도와주실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장 7-8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님께 기도하면 바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그때부터 저는 인생의 크고 작은 일, 삶속에서의 사소한 일들까지도 모두 주님께 맡겼습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제 기도를 들어주셨는데, 성경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문제나 난관에 봉착했을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성경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어디를 가든지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1997년 9월의 어느 일요일 날, 저는 평소와 같이 예배드리러 교회에 갔었습니다. 설교하시는 자매님은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두 자매님이 우리에게 교통해 주시도록 모셨습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분들은 말씀해주세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 자매님을 숭배해 왔었습니다. 자매님은 18살부터 주님을 믿어 올해 68세로 주님을 50년 동안 믿으면서 성경을 세 권이나 독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상당히 정통하셨었습니다. 그런 분이 오늘 스물 남짓한 어린 두 자매님들에게 설교를 부탁하다니, ‘저들이 주님을 믿은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우리에게 무슨 설교를 할 수 있겠나?’ 저는 몹시도 아니꼬웠습니다만 노자매님께서 추천해주셨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자매님이 우리에게 계시록 22장 1~5절의 을 가르칠 때, 저는 노래가 참으로 신선하고 듣기 좋아서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습니다. 이어 그 두 자매님들이 새로운 노래 를 가르쳐 주었는데, 그 노래 역시 분위기가 좋고 생기가 넘쳐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교회에서 불렀던 노래들에 비해 더욱 믿음을 생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두 자매님에 대해 그렇게까지 반감을 가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자매님들이 예수님께서 이미 돌아오셨다고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말세에 또 한번 성육신으로, 인자로 나타나 역사하신다며,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기초에서 말씀으로 심판하고 정결케 하시는 한 단계 사역을 하신다고 하면서 친히 작은 책을 펼치셨다는 등 내용들을 교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님이 그렇게 말하면서 성경을 내려 놓고 이라는 책을 꺼내는 순간 제 속이 끓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다니. 이건 절대로 안될 일이야. 예수님을 믿으면서 성경을 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근거야. 그러니 언제든지 성경은 보지 않을 수 없잖아!’ 제가 막 반박하려고 하다가 노자매님께서 거듭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을 보고는 하려던 말을 삼켜 버렸습니다. 노자매님께서 그들의 말을 인정하신다면, 제 성경 지식으로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을 것이고 도리어 난처해 질 테니, 그들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로 노자매님을 찾아가 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성경을 멀리하는 건 분명 잘못된 거야. 왜냐하면 성경에서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디모데후서 3:16)’라고 말씀하고 있잖아.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거야. 성경을 잘 지켰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복을 받을지 아니면 화를 입을지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러니 이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돼. 이 두 자매가 우리를 오도하고, 잘못 이끌게 해서는 안되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 계속 불안한 마음으로 가까스로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노자매님을 보니 두 자매님이 교통하는 것을 아주 인정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자매님은 시종일관 평온하고도 즐거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자매님이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저들이 성경을 벗어난 설교를 하도록 내버려 두실 건가요? 자매님이 그래 주님의 훌륭한 청지기가 맞은가요?’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집에 돌아가면서 저는 생각할수록 더욱 안타까워졌습니다. ‘내가 7-8년 동안 성경을 읽어왔는데, 지금 난데없이 성경을 내려 놓으라고 하다니. 그런데 노자매님은 또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니. 이것이 어찌 주님의 뜻에 맞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교회의 형제 자매들 다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만에 하나 주님이 정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돌아 오셨다면, 난 주님을 영접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난 저들처럼 성경을 내려 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불안한 마음에 걷고 있는 길마저 울퉁불퉁하게 변한 것 같았습니다. 제가 허둥지둥 집에 갔더니, 남편은 저의 불안한 모습을 보고 급히 저에게 “당신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하는 거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요?”라고 물었습니다. “아이 참! 말도 마세요. 오늘 교회에 두 어린 자매들이 와서 설교했는데, 글쎄 예수님께서 이미 돌아오셔서 작은 책을 펼치셨다고 했어요. 이것 좀 보세요. 우리에게 또 책도 한 권씩 나눠주면서 이건 하나님의 새 말씀이라는 거에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앞으로는 이라는 이 책을 보라고 하더라고요. 당신 말해 보세요.우린 몇 년 동안 주님을 믿으면서 계속 성경을 읽어 왔어요. 또 성경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었나요? 우린 언제든지 성경을 내려 놓아서는 안돼요!” 남편도 “오! 그런 일이 있었어요?”라고 말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깊이 생각하더니 “나 역시 당신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우린 주님께 양심이 있어야 해요.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성경을 봐야지. 성경은 언제든 내려놓아선 안돼요.” 남편의 긍정적인 대답에 저는 성경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저녁에 저는 성경을 앞에 놓고 꿇어 앉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른 이에게 주님의 양들이 도적 맞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라고 구했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저는 여전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주일이 되자 저는 성경을 챙겨 일찍 출발하였습니다. 도 가방에 넣었는데, 그건 어떻게 그 책을 대해야 할 지 몰라 노자매님과 여러 성도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노자매님을 만나자 저는 자신의 관점을 몽땅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은 웃으면서 “자매님, 이건 확실히 사소한 일이 아니니 신중히 대해야 해요. 우리가 주님께서 오시는 일에 대해 맹목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주님께 득죄하기 너무 쉬워요. 자매님이 주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꼭 그분의 뜻을 알도록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매님이 이렇게 말씀할 것이란 예상은 하지 못했었지만, 자매님의 태도를 보니 이미 결론을 내린 것 같았습니다. 그 날 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 들지 못하다 자매님이 오랫동안 주님을 믿으면서 분별있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혼란스러웠던 그 당시 자매님은 목사와 장로의 핍박과 배척 속에서도 기도의 힘을 빌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호히 삼자교회(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의 지위를 내려놓고 잡혀 철창에 갇힐 위험을 무릅쓰고 가정교회에 들어가 계속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자매님을 매우 존중하며 탄복했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자매님은 기도로써 찾고 구하지 않고서는 아무렇게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성경을 벗어난 건 어떻게 말해도 잘못된 거잖아요!’ ‘주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라고 하는 그 순간 “이해 되지 않는 일이 있거든 기도를 많이 하며 찾고 구하라”고 하시던 노자매님의 당부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앞에 꿇어 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릴 위해 창세하시고 모든 걸 이루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지금 형제 자매들은 모두 성경을 내려 놓고, 을 읽으면서 그것이 주님의 새 말씀이라고 합니다. 주님! 지금까지 주님을 믿는 사람 중에 성경을 벗어난 사람이 누가 있었나요? 그런데 지금 예배할 때 교통하는 건 모두 성경의 내용이 아닙니다. 주님! 저는 어떻게 주님을 믿어야 합니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인도해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은 제 발의 등이고 제 길에 빛입니다. 저는 주님의 인도를 기다겠습니다.”

그 후에도 저는 계속 성경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예배드릴 때 교통하는 내용이 성경 말씀에 부합될 때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성경에 부합되지 않을 때는 못 들은 척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형제자매들이 ‘각성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의 정형은 점점 더 좋아져 사람마다 얼굴에 기쁨이 넘쳤는데, 자신은 오히려 마음이 점점 더 우울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억지 웃음을 지으며 형제자매들의 안부를 물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예배에서 형제 자매들은 모두 흥미진진하게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터득과 인식을 교통하면서 저마다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였지만, 저는 그들이 교통하는 것을 거의 알아 들을 수 없어 목석같이 앉아 말참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바보처럼 옆에 앉아 있으면서 너무 슬프고 괴로워 마음속으로 주님께 부르짖을 뿐이었습니다. “주님! 예전에는 주님께서 늘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깨우쳐 주셨는데, 지금은 왜 깨우쳐 주시지 않으시나요? 설마 저를 버리신 건 아니겠지요? 주님, 주님은 저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부디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가 열심히 주님께 부르짖었으나 주님의 응답이나 위안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렸습니다. ‘주님께선 날 버리셨나봐…’

집에 돌아온 저는 더 이상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 엎드려 울며 불며 주님께 하소연 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성경을 내려 놓고 주님을 멀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수년 동안 주님을 믿어오면서 지금처럼 마음이 어두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주님! 제발 얼굴을 숨기지 마시고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형제 자매들은 모두 그 새 말씀을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발하신 음성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을 읽고 다들 큰 수확이 있다며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는데, 저는 오히려 흑암 속에 떨어져 주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막막하여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직시해야 할 지 모르겠나이다. 주여, 이 정말로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발하신 음성인가요? 만일 정말로 주님의 음성이라면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주님의 음성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 역시 주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여기까지 기도를 드리자 갑자기 예수님께서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머릿속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이미 오래도록 문 밖에서 기다리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가슴이 뜨끔하며, 문득 제가 주님을 문 밖에 계시게 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자책과 뉘우침, 그리고 죄송함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저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급히 바닥에서 일어나 성경책을 꺼내 계시록의 3장 20~22절을 보았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저는 그것이 성령의 깨우침임을 확신하고는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회한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의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 제가 주님의 오심을 이렇게 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가 눈이 멀고 우매하여 주님의 음성을 알아 듣지 못하고 주님께서 문 밖에 서 계시게 하였습니다…제가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주님께 실망드렸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저는 계속 주님의 음성을 거절하고 어둠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 말씀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부디 저의 과오를 덮어주시고 계속 저를 구원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 후 제 마음은 한없이 편해지고, 가슴을 누르고 있던 큰 돌이 옮기운 듯 기분이 아주 홀가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저는 잃어버린 지난 시간들을 모두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가 성경을 떠났다는 이 일에 곤혹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경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것은 원칙적인 문제이다. …오랫동안 사람이 전통적으로 믿어 온 방식(세계 3대 종교 중 기독교의 믿음법)은 성경을 보는 것인데, 성경을 떠나면 주를 믿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떠나면 사교(역주: 사이비 종교)이고 이교(異敎)라고 하며, 설사 다른 책을 보더라도 반드시 성경 해석을 기초로 한 책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주님을 믿으면 성경을 보고 성경을 먹고 마셔야 하며, 성경 이외에 또 성경과 관련되지 않는 다른 책을 숭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고 한다. 성경이 생긴 이래로, 사람이 주님을 믿는 것은 성경을 믿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기보다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낫고,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고 하기보다는 성경을 믿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낫고, 주 앞에 돌아왔다고 하기보다는 성경 앞에 돌아왔다고 하는 것이 낫다.』(<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ㆍ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읽고 저는 마치 하나님을 직접 마주하여 가르침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 맞아. 내 마음속 생각은 하나님 말씀에서 밝히신 것과 똑 같아. 하나님을 믿으면 성경을 봐야 하고 성경외의 다른 서적을 보면 안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여겼었지. 하지만 난 그래도 잘 모르겠어. 성경은 다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신 것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주님을 믿는 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럼 성경 앞에 돌아온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는 것은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일까?’ 저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한 사역을 기록한 역사책에 속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옛 선지자의 예언들이 기록되었고, 여호와가 그 당시에 역사했던 말씀들도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 그 책을 ‘거룩하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다 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자 하나님을 앙모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 책을 그렇게 칭한 것은 단지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 경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인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 책을 ‘천서(天書)’라고까지 하였다. 사실, 그 책은 단지 사람의 기록일 뿐이지 여호와가 친히 명명하거나 친히 지도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 책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칭한 것은 다만 사람들이 그 책을 대하는 존칭일 뿐, 여호와와 예수가 공동으로 연구 토론한 다음 다시 결정한 것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책은 여호와가 기록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예수가 기록한 것도 아니라 많은 옛 선지자, 사도, 예언자들의 기록을 후세들이 수집하여 편찬한,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거룩한 고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보기에 그 속에는 사람이 측량하기 어려운 많은 심오한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후세들이 풀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책을 더욱더 ‘천서’라고 여기게 되었다. 거기에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 및 <계시록>까지 더해져, 그 책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그 어떤 책을 대하는 것보다 각별했다. 그러다 보니 감히 그 ‘천서’를 해부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그 책이 너무나 ‘신성(神聖)’하기 때문이다.』(에서 발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천고의 비밀을 밝혀 성경의 수수께끼도 풀렸고 제 마음속에 곤혹스러웠던 문제도 모두 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한 사역을 기록한 역사책에 속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성경에는 확실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역사하신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에 하셨던 사역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자 전 인류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계속 전 인류를 인솔하고 공급하고 계셨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에서만 역사하신다고 할 수 있겠나요? 또 어떻게 성경 속에 있는 말씀만 하실 수 있겠나요? 사람들이 성경을 ‘성서’라 칭하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인해 성경을 이렇게 존칭하여 불렀지만, 사실 성경의 저자는 고대의 선지자와 예언가, 그리고 사도들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보다시피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증거하는 한 권의 역사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5:39-40)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주 예수님의 말씀을 결합하여 대조해보니 주님의 말씀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실 수 있는데, 성경은 그런 사역을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확실히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고, 성경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논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지 하나님의 새 역사를 거부하면서 성경을 지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수록 성경의 실질과 내막에 대해 더욱 깨달아졌습니다. 또한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수년 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고집했던 관점은 성경을 하나님과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면서 동등하게 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떠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죠. 하지만 저는 사실 성경의 실질과 성경의 본래의 가치에 대해 전혀 몰랐고, 주님을 믿는 것과 성경을 믿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실제적인 뜻을 전혀 모르면서도 자신의 관점을 진리인 양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며 하나님의 말세 역사와 말씀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정말 너무나 우매무지하고 너무나 교만 방자하며 이성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무지에 따라 저를 대하지 않으시고 정죄하시지도 않고 도리어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를 성경에서 조금씩 나오게 하셔서 하나님 보좌 앞에 오게 하시고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받아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게 하셨고 성경의 내막과 실질에 대해서도 알게 하셨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닫고 있었던 마음의 문을 드디어 하나님께 열고 다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회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새 음성과 말씀 속에서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하나님께 충심으로 되는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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