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골반에 이미 진입해있다는 말을 들은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일찍 나올거란 말과 달리 좀처럼 진통이 오지 않아 애가탔다.
3km씩 가볍게 공원을 돌고 짐볼 위에 앉아 무거운 배를 출렁이며 공을 튀겨보아도 아기는 꼬물꼬물 놀기만 할뿐이었다.
이미 초음파로는 한 화면에 아기가 잡히지 않을만큼 커진 은똥이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듯 했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어서 40주의 대장정을 끝내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밤마다 약한 가진통이 찾아오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진통 주기를 체크하며 진통이 거세지길 기다렸다.
해봤어야 알지, 도대체 뭐가 진통이야?
임신 막달이 되면 잦은 배뭉침이 온다. 종아리에 쥐가 나듯 근육이 수축하는 느낌이 배에서 느껴지며 딱딱하게 뭉치는데, 때로 이것이 심하면 억 소리나게 아파 진통으로 오해하곤 한다.
분명 나올 때가 되었고 여러 출산 징후도 보였으니 신경이 곤두서는 건 당연하다. 배뭉침이 점점 심해져 통증을 수반하였다.
-진통인가봐!
이제 곧 나도 비명을 지르게 되는걸까. 꽤 아프긴한데 이정도면 애낳을만 하다, 라는 거만한 생각을 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아기심박 및 진통수치 측정장치
남편과 대기실로 향하니 간호사가 어쩐일이냐고 물었다. 배가 아프다고했더니 배 여기저기에 무언가를 붙여대며 이렇게 말했다.
-아마 아직일거에요. 초산이시죠? 허리 피고 들어오는 분들은 보통 아직이더라구요.
분명 배는 아팠다. 기계의 진통수치도 최고치인 99를 찍고있었지만 간호사는 얄밉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시래요’라는 의사의 말을 전했다. 주기적으로, 정말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프면 꼭 다시 오라고 하며.
도대체 얼마나 아파야 하는 거야?
뭐가 진통인 거야?
우매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이튿날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다.
2015.08.04 새벽 4시 경.
퍽!
배구공에 맞은 듯한 통쾌한 타격음에 놀라 화들짝 잠에서 깼다. 하지만 집은 고요했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다릉다릉 기분좋게 들려왔을 뿐이다.
아기도 자는지 뱃속도 고요했다.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로 향하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주르륵, 변기에 떨어지는 무언가는 분명 소변이 아니었다. 내가 내보낸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로만 듣던 요실금인가!
이미 별별 망가짐을 다 겪은 직후라 그저 우울하게 속옷을 올리던 순간, 무언가가 계속 흘러나왔다. 냄새늘 맡아보니 약한 락스냄새가 났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여보!!!! 나 양수터진것 같아!!!
아무리 소리쳐도 깨지 않는 남편의 등짝을 후려쳐 깨운 뒤 부푼 마음으로 차에 탔다.
양수는 흐르지만 통증은 아직 없었다. 힘주려면 꼭 밥을 먹고 가란 선배들의 조언대로 나는 기어코 속을 든든히 채우고 가겠다며 당황한 남편을 끌고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오버나이트 생리대가 슬슬 젖어들어갈 무렵, 순대국밥을 후후 불어대던 그 때, 강렬한 통증이 배를 강타했다.
눈물이 찔끔났다. 아파도 이건 너무 아팠다. 하지만 삼십초 가량 지속된 후 오분 정도는 평온했기에 순대국을 싹 비우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여보, 난 우아하게 낳을 거야
이틀전, 이정도 진통이라면 난 기꺼이 인내하고 참으며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을 거라 말했었다.
구령에 맞춰 힘주며 우아하게 출산 할거라고.
병원에 도착할 당시 이미 나는 급속한 분만 진행이 되어있었고 자궁문이 30%가량 열린 후였다. 말도 안되는 통증이 찾아왔다.
으으으으으!
참아보려해도 흡사 짐승의 소리가 입을 비집고 튀어나왔고, 30초 간격으로 진통이 찾아올때면 침대 헤드를 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려 몸을 꼬아댔다.
기차가 밟고 가는 듯한 아픔이란게 빈말이 아니었다. 우아는 개뿔! 결국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때 왜 손 안잡아줬어? 란 내 물음에 남편은 머쓱하게 웃으며, 주위 아기아빠들의 조언대로 행동한 것 뿐이라고 말했다.
-와이프 진통할때는 초인이 된다더라. 어찌나 악력이 쎈지 잘못잡히면 손 으스러진다고.
남자들이란….
간호사들이 들어와 친정엄마를 쫒아냈고 남편만을 남긴채 힘을 주라고 했다.
자궁문이 빠르게 열리는 바람에 관장을 못했던게 그와중에 떠올라 ‘실수’할 것이 염려되었다. 하지만 다시 진통이 찾아오자 이 지옥같은 순간을 끝낼 수만 있다면 영혼도 팔 수 있을 듯했다. 똥 정도야.
진짜 지옥이 펼쳐졌다. 진통이 오는 순간에 맞춰 힘을 주라는데 가뜩이나 심한 통증은 힘을 주면 더 심해졌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자궁문 입구를 열어주기 위해 간호사들이 입구에 손을 넣고 마구 헤집어댔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면 혼이 났다.
-엄마, 소리지르면 안 돼요. 힘이 분산 돼서 안 돼.
남편은 분만이 시작되자 기꺼이 손을 내주었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더더더더 라고 외치는 간호사에게 이 이상으로 더 힘을 줄 수가 없다고, Max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비명만이 터져나왔다.
그러던 와중, 옆 방에서 울려퍼지던 비명 소리가 별안간 뚝 그치고 아기 울음 소리가 선명하게 내 귀에 들어왔다.
옆 방 산모가 아기를 낳은 것이다.
땀과 눈물 콧물이 뒤섞인 얼굴로 나는 다시 한번 힘을 내보았다.
이윽고 의사가 들어왔다. 힘줘요! 라고 말하는 순간 살점이 잘리는 쓱쓱 소리가 났다. 아기가 나오며 회음부를 찢는 것을 막기위해 미리 절개를 해두는 소리. 진통 때문에 그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 힘이 많이 빠진 것 같으니 푸쉬 좀 해줘
지시가 떨어지자 마자 두 명의 간호사가 침대에 올라탔다. 힘을 줄 때 아래로 내려오는 아기가 다시 올라가지 않도록 체중을 실어 배를 눌러댔다.
그들 역시 필사적이었고, 도움에 힘을 얻은 나는 마지막 젖먹던 힘을 내어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져나갈 때까지 힘을 줬다.
-보인다! 머리 만져지네, 보인다!
분명 그렇게 외치고 있지만 좀처럼 아기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점점 탈진증상이 오고 있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남들은 제왕절개 시켜달라고 빈다던데,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따위 할 수 없었다.
살려줘 여보, 살려줘, 살려주세요
그렇게 한시간을 더 빌고 외치고 비명을 질러댄 후, 무언가 미끄덩 배출되는 느낌이 났다.
힘차게 울어대던 아들, 아직도 이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난다.
말도 안 돼.
응애 응애 소리가 우렁차게 분만실에 울려퍼졌다. 정녕 내 뱃속에 있던 이 아기의 소리인가
내아들인가
내가 낳은건가
어디보자 내새끼, 손가락 열개 발가락 열개…
그토록 안아보고 싶었던 아이가 내 품에 처음 안기는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갖태어난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눈을 떠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 까만 눈과 오물거리는 입이 가슴 귀퉁이를 먹먹히 적셨다.
이건 기적과도 같았다.
고맙고 미안하고 희열과 환희가 몰려옴과 동시에 슬펐다. 아직도 모르겠다. 도대체 그 감정이 뭐였는지.
출산 후 임신 중이던 친구들에게 ‘어땠냐’는 질문을 꽤나 받았다.
아팠어, 라고 말하고는 더불어 그 당시의 감동을 떠올리다가 감히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 그냥 고개만 끄덕여 버리곤 한다.
회음부가 많이 찢어졌다고 봉합해야 하니 마취제를 투여하겠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고, 정말 고생했다는 말하며 머리를 쓸어주는 남편의 손길이 느껴졌다.
병실로 옮겨졌다. 신생아 면회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난 ‘첫소변’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화장실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다. 침대 상체를 조금만 세워도 어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극심한 출혈성 빈혈이었다. 결국 엄마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로 향하던 중 기절하여 아들을 보러가지 못했다
홀로 면회한 남편이 보여준 사진. 어찌나 못생겼던지, 하지만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럽던지.
아마 모든 부모들이 같은 마음일거다. 신생아는 참으로 못생겼다. 양수에 퉁퉁 뿔어 심술궂어진 눈과 얼굴이 객관적으로 이뻐보이진 않다.
하지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과 사랑이 차오른다. 정말이지, 가슴이 벅차다. 못난 얼굴이 더없이 어여쁘다.
생후 3주, 먹고 자고 싸고 울고.
엄마가 되었다.
열 달간의 대장정이 끝이 났다.
이제 한 평생의 농사를 시작하는 출발점에 서서
나는 몇 번이나 작고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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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원정대 8화
02. 다른 행성으로 (4)
루이스와 데이브는 루미너스호에서 하선 수속을 밟는 중이었다.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국군이 짧게나마 수사 협조를 부탁드린다는 안내와 함께 여권과 신상 조사를 시작했다. 타이나 인은 특별히 다른 곳으로 안내해 DNA 채취를 요청했고, 타 성인은 여권과 신상 조사만으로 끝냈다. 긴장한 표정으로 제국군과 마주한 루이스는 별다른 이상 없이 통과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넘어가다니, 그동안 걱정했던 게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함선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함선에서 하선하자마자 복부를 찌르는 진통이 밀어닥쳤다.
“아, 아윽……!”
“루이스! 왜 그래? 루이스!”
“배가, 배가, 너무……!”
복부 전체를 쥐어짜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루이스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환승 센터 내 관광객들이 무슨 일이냐는 듯 일제히 루이스를 힐끗거리며 웅성거렸다. 배를 감싸 쥐고 바닥에 쓰러진 루이스를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데이브는 침착하게 루이스의 몸을 감싸 안았다. 설마, 벌써 진통이 온 건가? 예정일은 한참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어떻게 아파?”
“모, 르겠……! 으윽!”
“안 되겠어, 일단 구급차를 부를게. 조금만 참아.”
“아악……!”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금 비명을 지르는 루이스의 모습에 데이브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이내 빠르게 휴대폰으로 가까운 응급 센터 전화번호를 검색해 연결했다. 출산 예정일이 한 달 남짓 남은 임산부이며 지금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는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지역을 이야기하자 응급 센터는 곧바로 구급차를 보내겠다고 응답했다. 전화를 끊은 데이브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루이스가 보다 편하게 몸을 가눌 수 있게 팔로 지탱해 주었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구급차가 좀 있으면 도착할 거야.”
“데이브…… 군은, 제국군은…….”
“걱정하지 마.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
응급 상황이지만, 길 한복판에서 배를 붙잡고 쓰러진다면 주변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면 좋을 것이 없었다. 최대한 조용히, 다른 관광객들과 섞여서 움직이는 게 최선이건만, 이리 북적거리는 곳에서 쓰러지다니. 루이스는 혹시나 제국군이 자신들을 알아볼까 봐 노심초사하며 끙끙 앓았다. 그런 루이스의 모습에 데이브는 아픈 와중에 별걸 다 걱정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 제국군으로 보이는 남성 몇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제국군을 발견하자마자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숨을 삼키는 루이스에게 데이브가 속삭였다.
“쉬, 표정 관리. ……알지?”
“흐윽, 큭…….”
루이스는 그제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처럼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반응한다면 아마 제국군들도 의심을 갖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혹시나 싶어 더 조사하고자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었다. 최대한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루이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감았다. 그래, 차라리 눈을 감고 방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끙끙 앓기만 하자.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아아, 아닙니다. 구급차를 불렀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데이브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호의를 정중히 거절하자 군인들은 알겠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들이 갖고 있던 무전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구역 이탈하지 말라는 말 못 들었나? 자네들 상관이 누군가!
“죄송합니다. 여기 응급 환자가 발생해서 무슨 일인가 하고 와 본 겁니다.”
-응급 환자? 신상 정보 파악했나?
“아직입니다.”
-파악해.
“예, 알겠습니다.”
배를 붙잡고 고통을 참는 와중에도 무전 내용이 들린 것인지, 루이스는 다시금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졌다. 무전기 속 목소리는, 자신 또한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다름 아닌 미하엘의 직속 보좌관이자 군 소속 중위를 맡고 있는 카일이었다. 훅, 후욱, 하는 심호흡과 함께 루이스는 최대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무리 앓는 소리라고 하나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에 차마 앓는 소리마저 낼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타이나성의 군 수사대입니다. 실종자를 찾고자 함이니 조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 그거라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는 방금 도착한 루미너스 함선의 탑승객이었습니다. 하선할 때 조사를 전부 끝마쳤습니다.”
“그렇습니까? 실례지만 성함이…….”
“루솔 블리소그, 제이미 아디게일입니다.”
“잠깐 여권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타이나 인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행성인들은 철저히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다는 설명에 데이브는 순순히 여권을 건넸다. 그는 여권을 받아들곤 자신의 부하에게 짧게 눈짓했다. 그러자 부하인 듯한 남자가 눈치껏 갖고 있던 수신기의 화면을 열어 여권에 갖다 댔다.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무언가가 표시되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데이브에게 여권을 건넸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깍듯이 목례를 한 두 군인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들의 앞에 서 있던 사내들이 멀리 사라지자 루이스는 참았던 숨을 힘겹게 터트렸다. 찢어질 듯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두렵고 긴장되는 몇 분이었다. 데이브 또한 아예 긴장을 늦추진 않던 것인지, 식은땀을 흘리며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윽…… 데이브.”
“이제 안심해. 군인들은 갔어.”
“하악, 으윽……! 아아……!”
그제야 루이스는 안심하고 마음껏 비명을 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차에 탑승한 후, 빠르게 응급 센터로 향했다. 구급차 안에 누워서 고통을 참는 내내 루이스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조금 전 자신에게 다가왔던 제국군의 모습에 다시금 미하엘과 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하엘이 지금 혈안이 되어 자신을 찾는 중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지금쯤 자신을 원망하고 있겠지. 스스로 떠났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잔나의 수신에 의하면 지금 데이브는 대공비를 납치한 1급 수배범이 되었다고 했으니. 아마 그라면 자신이 정말로 납치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떠났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니까. 모든 정황이 자신에게로 쏠려 있지만 그것들을 데이브에게 돌리고 현실을 도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부보다 가슴이 더 아파 왔다. 진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아파 신음하는 것인지 이제 자신 또한 잘 모르겠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루이스의 손을 잡아 주며 데이브는 낮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양수가 터져 당장 출산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말에 루이스는 이유 모를 절망감을 느꼈다. 제국군이 쫙 깔린 이 환승 센터를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데 출산이라니. 이렇게 불안한 곳에서 출산을 해야 한다니.
“어쩔 수가 없어. 세 번째 환승 센터로 향하는 디스노미아 호는 소함선이야. 루미너스 호와는 달리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료 기관의 의료진 밖에 배치되어 있지 않아. 민간 기업과는 달리, 만약 그 의료 기관에서 수술을 하게 된다면 의료 기록이 남게 되어 있어.”
“의료…… 기록?”
“그래, 민간 기업은 환자의 의료 기록을 삭제해 주는 것도 가능하고,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정부에 환자의 기록을 공개하지 않지만 국가 의료 기관은 달라. 의료 기록이 남는 데다가 타성에서 요청하면 그 기록을 공유하기도 하지. 우리가 타 성인으로 위장하긴 했지만 그런 기록을 남기는 건 좋지 않아. 그러니 불안하더라도 여기서 아이를 낳자.”
결국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는가.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고 운항하는 것이 목적인데. 하필이면 지금 탑승해야 할 디스노미아호 함선이 국가 의료진만 배치되어 있는 소함선이라니.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 탑승 수속 마감 전에 끝마칠 수 있을 거야.”
“……네.”
이런 중앙 환승 센터에 설립되어 있는 병원들은 주로 의학 기술이 발전한 행성의 최고급 의료진들이 배치되어 있다. 최상급 의학 기술대로라면 아마 나흘 이내에 정상 퇴원을 하고 탑승 수속까지 마칠 수 있을 것이다. 환승 센터에서 출산하는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디스노미아호가 출발한 후에 진통이 시작되었다면 분명 출산 기록이 남았을 테니까. 혹시 모르니 아주 작은 기록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남기지 않게끔 해야만 했다.
수술 동의서를 작성한 후, 빠르게 수술에 들어갔다. 남성 오메가라 개복술로 출산을 해야만 했다. 생각 외로 수술은 아주 빨리 끝났다. 산모도 건강하며 조산치고는 아이의 건강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의료진의 설명에 데이브는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발전한 의학 기술 덕분에 루이스는 배에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수술실에 들어가 마취를 기다릴 때만 하더라도 드디어 아이가 나온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났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첸과 미하엘의 얼굴이 떠올라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또한, 생애 처음 가진 아이를 자신이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 행복하지가 않았다. 물론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은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보다 더 큰 걱정 때문에 마음 편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 반, 설렘 반. 기쁨 반, 슬픔 반의 설명 못 할 복잡한 심정으로 루이스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아이를 낳는 건 처음이시라고요?”
“네, 처음이에요.”
“많이 떨리시죠? 걱정 마세요. 잠깐 눈 붙였다가 뜨고 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루이스를 안심시키려 미소 짓는 간호사는 검은 피부와 파란 눈동자, 그리고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는 에오스 행성인이었다. 의학 기술이 가장 뛰어나기로 유명한 에오스 행성은 자성인 타이나에서도 아주 유명했는데, 에오스 인들을 고용하고자 정부에서 기를 쓸 정도로 그들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오죽하면 만약 의사가 에오스 인이면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그저 몸을 맡기면 된다는 맹신적인 말장난이 생겨났을까.
자신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는 간호사가 에오스 인이라는 사실 덕분인지 루이스 또한 부드럽게 표정이 풀렸다. 여전히 자신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미하엘의 얼굴과 천진난만한 첸의 미소가 떠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77환승 센터를 압수 수색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한 달이 지났음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자 카일은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졌다. 미하엘의 들볶음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부부싸움 한번 거창하다. 이쯤 되니 이 무시무시한 남자에게서 도망을 치려고 한 루이스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보통 내기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집요하고 엄청난 남자에게서 도망칠 궁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거의 몇백 만에 달하는 제국군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비의 그림자 하나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미하엘은 격분했다. 루이스가 안주인으로 가문에 들어오고 난 후 평화를 맞았던 저택은 다시금 초상집 분위기로 돌아가 도통 예전 분위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아나, 카일?”
“…….”
안다고 해도 처맞을 것이고, 모른다고 해도 처맞을 것임이 분명했기에 카일은 닥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피가 거꾸로 솟아. 악몽 때문에 한 시간 이상 못 잔 지 꽤 되었지. 뭐든 먹으면 속이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어. 수시로 찾아오는 두통 때문에 욕이 튀어나오고, 가끔 호흡 곤란까지 오곤 해. 안정제와 수면제 없이는 하루도 못 버티지. 아주 생지옥이야. 이렇게 끔찍할 수가 없어.”
카일은 ‘각하만큼 저도 생지옥입니다. 그리고 그 생지옥의 원인은 네놈 자식이고요’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간신히 입을 닫았다.
그런 카일의 심정을 알 리가 없는 미하엘은 다시금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서 결과가 어떻다고?”
방금 다 들어 놓고 왜 되새김질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 하나 피 말려 죽일 작정인 건지. 한 번 들었으면 제대로 알아먹을 것이지. 아아…… 그랬지, 참. 이 대단하신 공작 각하는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 이렇게 되묻는 게 아니었지, 참. 그래, 맞다. 자신을 피 말려 죽일 작정인 것이다. 마누라가 뒤통수치고 튀어서 피가 바짝바짝 마르니, 부하인 자신에게까지 같이 마르자며 질질 끌고 가는 것이다. 징글징글한 물귀신처럼.
“유감이지만…… 아무래도 이미 환승 센터를 빠져나가신 것…….”
콰앙. 두꺼운 하드커버와 두께를 자랑하는 책이 벽을 향해 날아갔다. 소리만 들어선 의자나 책상 하나가 날아간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타격음이었다. 들고 있던 서적을 벽으로 내팽개치다 못해 꽂아 넣은 미하엘이 후우, 하고 다시금 심호흡을 했다. 분노와 인내가 뒤섞인 살벌한 숨소리에 카일이 한껏 몸을 움츠렸다. 정말 사람 하나 죽어 나갈 것임이 분명하다.
“투입된 군인이 몇 명인 줄 아나?”
“……죄송합니다.”
왜 모르겠는가. 다름 아닌 자신이 처리했던 일인데.
사람 한 명 잡겠답시고 몇백만 명의 군인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환승 센터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뒤지기 시작한 지 한 달이다. 더 이상 군사력을 낭비할 수 없다는 황제의 압박까지 들어온 상태다. 이미 환승 센터를 빠져나간 것 같다는 보고를 들은 미하엘이 이성을 잃기 직전까지 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스, 루이스, 루이스. 허니. 나의 사랑. 마지막 연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피앙세. 당신이 이렇게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 줄이야. 침대에서 사랑한다 속삭이며 뒤에선 이런 앙큼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미하엘은 비틀린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애정이 증오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루이스를 향한 살욕이 끓어오르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고, 만약 찾아낸다면 이것들을 어떻게 죽여 줄까 하는 마음이 들끓었다. 영원히,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게 발에다 족쇄를 걸고 영원히 감금시켜 버리겠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험한 우주 안에서 위험한 일에 휘말리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돌아오기만 하면 뭐든지 하겠다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울부짖다가도 영원히 고통받게 해 주겠다며 저주를 퍼붓는다. 하루하루가 정말 고통의 연속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보고드리는 이유는, 더 이상 환승 센터를 뒤지는 일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왕 뒤질 거 일단 부딪쳐 보자는 심정으로 카일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광인처럼 분노한 얼굴로 넋을 놓고 있던 미하엘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일단, 가까운 행성부터 시작해 수사대를 보내는 게 어떠할까 합니다…….”
“가까운 행성이라…….”
“알아봤는데, 저희 군 인력을 투입하는 것 말고도 행성 내에 브로커와 용병을 잠입시켜 수사를 한다거나 하는 방법도 고려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군을 투입하면 그만큼 부담이 되기에…….”
“군사력 말고 돈을 쓸 때가 되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군 간부 측에서도 지나친 군사력 낭비라는 의견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우주는 저희 제국군만으론 수사가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너무 넓고, 항로를 이용하는 우주인들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이런 면은 미하엘 또한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카일의 말대로 우주는 너무도 넓었다. 군을 투입해서 찾기란 무리였다. 더군다나 이미 환승 센터를 벗어난 것 같다는 결과가 나온 이 시점에서 더 이상 군사력을 낭비한다는 것은 그저 의미 없는 일에 가까웠다.
어차피 테일러 가문은 넘치는 게 돈이었으니, 제국군은 필요한 최소 인원만 투입해 수사를 하고 돈으로 인력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 것이다.
“사흘 내로 처리해.”
“예?”
“못 들었나? 자네가 말했던 것들, 사흘 내로 처리해서 보고서 제출하란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타 행성에 브로커 투입에 수사대 고용까지, 그걸 어떻게 사흘 내로 처리한단 말인가. 이번에도 잠은 다 잤구나 싶어 카일은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카일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미하엘의 서재를 나섰다. 미하엘은 카일이 나간 후,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얼핏 봐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보였다. 근 한 달 동안 통 잠을 자지 못한 데다가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겹쳤기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미하엘은 다시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갑자기 돌변한 루이스. 이혼을 하자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던 루이스. 다시 마음을 바꾸고 사랑한다 안겨 왔던 루이스. 그리고 말없이 도망친…….
겨우 3년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그동안 너무도 행복했다. 돌아올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에 입꼬리는 항상 승천했었고, 자신을 보는 사람마다 뭐 좋은 일 있냐고 물어 왔다. 그리고 그 물음에 자신은 항상 답했었다. 사랑스러운 아내의 힘이라고.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목에 안겨 와 볼에 입을 맞추는 루이스의 모습에 한없이 행복했고, 이 행복한 나날들이 영원히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루이스의 마음이 변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 행복했던 생활이 겨우 3년 만에 이렇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걸 알았더라면 루이스와의 결혼을 택하지 않았을까?
“아니, 아니지.”
그래,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아마 자신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더라도 루이스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만큼 루이스를 사랑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돌리기 위해 발버둥 치며 붙잡았겠지. 필요하다면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