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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처럼 -색종이 오려 꾸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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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대신 가위로 ‘색종이 오리기’… 마티스의 색다른 매력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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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붓 대신 가위로 ‘색종이 오리기’… 마티스의 색다른 매력속으로 Updating “나는 항상 내 노력을 숨기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내게 작품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결코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내 작품이 봄날의 가벼운 기쁨을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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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대신 가위로 ‘색종이 오리기’… 마티스의 색다른 매력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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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색종이 오리기, 이브 생로랑 드레스로 재탄생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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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마티스 색종이 오리기, 이브 생로랑 드레스로 재탄생 | 중앙일보 Updating 루마니아 민속 의상 풍의 블라우스, 알록달록한 식물 무늬의 아플리케(천 조각을 오려 붙인 것)로 장식된 드레스….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1936~2008)의 1980년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 의상) 쇼는 옷으로 재탄생한 앙리 마티스(1869~1954) 작품의 향연이었다. 그가 패셔니스타였다는 것은 아니고(그의 사진들로 보면 – 영감의 원천,마티스,색종이 오리기,이브 생로랑 드레스,CULTURE,생로랑,앙리 마티스,그림루마니아 민속,노랑 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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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 여객선

2 서승만

3 라온고

4 복어독 살인미수

5 이준석

6 민희진

7 김성태

8 한강 사진

9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10 김건희 논문

김건희 때린 ‘국민대 저승사자’…개그맨 서승만이었다 무슨일

배우 조한선 수해 복구 현장서 포착…“허리 한 번 안펴고 작업”

기억력 나빠지고 소화 안돼요…치매만큼 무서운 이 병 정체

여기가 한국이라고…’헌트’ 숨막히는 총격전 거리의 비밀 [GO로케]

사람 죽는데 철없다아직 중학생…논쟁 부른 정동원 사진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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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 패션이 된 그림

# 영감의 원천

# 마티스

# 색종이 오리기

# 이브 생로랑 드레스

# CULTURE

# 생로랑

# 앙리 마티스

# 그림루마니아 민속

# 노랑 드레스

아아·따아·아라·따라…커피 타입으로 본 나의 리더십 유형은

2022 올해의 시계를 만나다

위기의 화력발전소 수소・암모니아가 구원투수!

근로기준법 개정 후 사장님들 하소연

침대 회사가 왜 삼겹살 수세미를 팔지

로마를 담은 보석 이야기

마티스 색종이 오리기, 이브 생로랑 드레스로 재탄생 | 중앙일보
마티스 색종이 오리기, 이브 생로랑 드레스로 재탄생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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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 화가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판화·색종이 오리기 < 건축·미술·전시 < 문화·라이프 < 기사본문 - 자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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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20세기 최고 화가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판화·색종이 오리기 < 건축·미술·전시 < 문화·라이프 < 기사본문 - 자유일보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 '앙리 마티스: 라이프 앤 조이'에서 마티스의 드로잉과 판화 총 196점을 볼 수 있다(4월 10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 ‘앙리 마티스: 라이프 앤 조이’에서 마티스의 드로잉과 판화 총 196점을 볼 수 있다(4월 10일까지). 마티스(1869∼1954)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라고 평가된다. ‘색’만으로 ‘형태’를 만들어낸 작품들이 유명하지만, 이번 전시는 드로잉·판화, 색종이 오리기 같은 말년 작품에 주목했다. 세 명의 컬렉터 소장품들이다. 24점을 제외한 나머지가 30년 넘게 마티스의 판화를 수집해온 영국인 버나드 제이콥슨이 대여했다. 호주 시드니 주립미술관과 앙리 마티스 컬렉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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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 화가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판화·색종이 오리기 < 건축·미술·전시 < 문화·라이프 < 기사본문 - 자유일보
20세기 최고 화가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판화·색종이 오리기 < 건축·미술·전시 < 문화·라이프 < 기사본문 - 자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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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처럼 (색종이 오려 꾸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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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mmary of article content: Articles about 마티스처럼 (색종이 오려 꾸미기) 강렬한 색채의 작품으로 유명한 앙리 마티스는 말년에 손에 관절염이 와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마티스는 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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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티스처럼 (색종이 오려 꾸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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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 Conte #22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 색종이 : K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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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KUA Conte #22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 색종이 : KUA 생명을 가진 모두에게 노화는 반드시 찾아온다. 물론 해삼처럼 나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생물도 존재 하지만 대부분의 생명체에게 노화는 필연적이다. 생명을 가진 모두에게 노화는 반드시 찾아온다. 물론 해삼처럼 나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생물도 존재 하지만 대부분의 생명체에게 노화는 필연적이다. 우리는 노화가 가진 무시무시한 힘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길거리 노파의 걸음걸이에서, 노인이 오래 산 집의 냄새에서, 어느날 삐져나온 흰머리카락에서 노화는 그 발톱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고난은, 이 노화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 사고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장이 끝나는 시점에서부터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예고된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이 쇠락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 그 일은 아주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아니, 어쩌면 ‘일어났다’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암덩어리는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M의 몸에 자리 잡았을 테니 어떤 전조 증상이나 예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까지는 누구도 그 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그 소식을 마주해야 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아니 살아있는 역사로 알려진 천재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특권이기에, 나는 그의 일화를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소한 것까지 모두 기록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 나의 일기를 펼쳐보면 마치 M의 다큐멘터리같다. 하긴 그가 워낙 정력적으로 일해대는 탓에 그의 어시스트가 된 이후 나에겐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기도 했다. – 암이 발견되기 전에도 이미 M의 몸은 많이 노쇠해있었다. 일흔의 나이를 지나가고 있는 노화가는 붓을 쥐고 있는 것이 힘에 부쳐 손가락에 붓을 묶어서 작업하고는 했다. 관절염은 화가에게 올 수 있는 최악의 병 중 하나였다. 손가락에 힘이 달려 물건을 떨어뜨리기 일쑤였기에 M선생의 근처에 뜨거운 커피를 갖다놓는다거나 하는 것은 이 작업실에서는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다.  나의 아침 일과는 선생이 최대한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단 화실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내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창문의 먼지였다. 창문의 먼지가 한겹 쌓이면 화실의 빛도 그만큼 약해졌다. 나는 미묘한 빛의 변화가 선생의 작업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문을 청소할 때에는  짧지만 경건한 나만의 순서가 있었다. 먼저 바싹 마른 걸레로 창문을 닦고, 물기가 있는 밀대로 창문과 높이 있는 창문 틀까지 꼼꼼히 청소한 후 마지막으로 내가 아끼는 부드러운 천으로 물자욱을 마저 지워냈다. 지루하지만 이 작업을 끝낸 후 화실에 비치는 투명한 빛이 좋아서 나는 한 주에도 두 세번씩 이 과정을 거치고는 했다. 바닥과 가구,  창문 순서로 청소를 마치고 나면 M의 화구를 정리했다. 나는 어시스턴트로 들어와 1년이 지난 후에야 화구 정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선생은 어제 작업하던 모습 그대로 화구가 유지되는 것을 좋아했다. ‘작품의 연속성’을 위해 그렇다.’ 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그의 화구와 의자, 캔버스가 어제와 같은 자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먼지를 뒤집어 쓰지 않도록 했다. 물감통을 정돈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날 쓴 컬러를 그대로 빼어 팔레트 옆에 두었다. 여기저기 묻은 얼룩은 기름을 써서 최대한 깨끗하게 닦아냈다. 붓은 어제의 상태를 유지하되 너무 많이 써서 브러쉬가 뭉쳤을 때는 기름을 몇방울 떨어뜨려 부드럽게 만들고, 같은 크기의 새 브러쉬를 바로 쓸 수 있도록 숨을 죽여 옆에 놓아두었다. 밤 늦게까지 작업할 때 두르는 담요는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두개를 번갈아 가며 세탁해 먼지를 털어 잘 개켜 두었다.  조수들은 보통 새벽부터 일어나 이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가 화실에 나올 때는 대부분의 공간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아침의 루틴을 단순한 청소나 잡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아침 일과는 노쇠한 몸으로 계속해서 창작의 의지를 이어가는 대가의 예술에 한 점을 보태는 일이었다. 추운 아침 찬물에 걸레를 빨 때도 나는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그 일을 대했다.  그의 조수가 되는 것은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 적어도 12시간에서 14시간정도 쉼없이 일했고, 이는 몇몇 젊은 화가 지망생들이 이 화실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늘 긍정적이고, 환희에 가득찬 듯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지만 그 작품들이 탄생하는 과정은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일례로, 사람 얼굴 드로잉이 그러했다. M의 얼굴 드로잉은 너무나 간결해서 보는 사람은 단번에 ‘저 정도 그림은 나도 그리겠는 걸?’ 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그에게 ‘천재’라는 호칭을 너무 간단히 붙이데서 불만과 비슷한 감정마저 느꼈다. ‘천재’라는 단어에는 번뜩이는 영감으로 쉽게 작업하는 듯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옆에서 지켜본 바 그의 작업은 고통스러운 반복과 연습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 드로잉도 수천장을 다시 그리며 간결한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그는 이 드로잉이 ‘쉽게 그린 것 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하루의 작업을 끝내고 저녁이 되면 그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는 작품에 영혼과 체력을 모두 불어넣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그에게 암 선고가 찾아왔다. 다행히 수술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안 그래도 힘든 그의 작품 활동이 머지 않아 끝을 맺는 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그의 육체가 다른 고통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나는 경건하게 지켜오던 그의 예술이, 여전히 불타오르는 한 영혼의 창작이 육체의 노쇠함을 이기지 못해 마무리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새 M이 수술에 들어가는 날이 다가왔다. M은 발병 사실을 알고도 작업을 계속했다.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나는 이전과는 달리 허둥대며 그의 작업에 방해가 되기 일쑤였다. 그가 수술에 들어가자 나는 텅 빈 작업실처럼 그대로 끝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M은 수술을 하러 떠나며 작업실의 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을 남겼지만 조수 중 그 누구도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 결국 생의 끝에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사실, 시간이 인간에게 남기는 한계가 아직 젊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렸다.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 죽기 직전에야 빵을 한 조각 집어 우물댔고, 물을 삼키며 연명하듯 하루하루를 보냈다. 작업실 청소는 물론이고 열심히 하던 습작에서도 손을 놓았다. 무엇을 하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소멸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흐름을 알 수 없는 덩어리같은 시간이 지나자 M은 수술을 끝내고 회복에 들어갔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맞이한 수술은 그의 몸을 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문제가 없었던 그의 두 다리마저 그를 배신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여전했다. 처음에는 도움 없이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점점 두 팔에 힘을 더해 혼자 움직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종종 인사를 하러 갈 때마다, 나는 선생이 마치 그림작업을 할 때처럼 재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의사가 시킨 운동을 천천히 성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는 어렵지만 아직 운명이 그의 목숨까지 앗아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중간 중간 우리 조수들의 작업에 대해 묻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아 우리는 억지로 다시 습작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 떨림은 점점 심해져, 그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일은 요원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M이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진행 중이던 작업들을 잘 말려 종이에 싸서 보관해두었다. 먼지가 쌓여가던 캔버스와 화구도 정리해 한 켠에 세워두었다. 선생이 없이  조용하게 붓질과 스케치 소리만 들리는 작업실은 마치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같았다.  하지만 M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나의 예상을 깨고, 오래지 않아 휠체어를 타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먼지가 쌓인 창문이, 지저분한 바닥 얼룩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며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작업실이 전처럼 완벽하게 유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차렸겠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일 아침까지 휠체어 높이에 맞게 캔버스 다리를 조절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작업실 곳곳을 살피고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쉴새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전날 M이 돌아간 후로 모든 작업을 멈추고 작업실을 원상복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선생의 상태로 봤을 때 더 이상의 유의미한 작업은 힘들겠지만 노 화가의 마지막 의지를 꺾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 동안 쌓여있던 곳곳의 먼지와 쓰레기를 버리는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오밤중이 되어서야 청소는 끝났고, 모두는 녹초가 된 채 잠을 자고 씻지도 못한 얼굴로 작업실에 나왔다.  아침 9시가 되자, 선생은 믿을 수 없을만큼 전과 똑같은 표정과 기색으로 작업실에 등장해 전 날 우리가 높이를 조절해둔 캔버스 앞으로 갔다. 붓을 손에 묶고, 엉망으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작업을 시작했다. 몇 초나 흘렀을까, 우리는 떨리는 손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긴장감 어린 시선을 거두어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이 쥔 붓의 물감은 여기저기로 튀었지만 그는 여기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듯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오후, M은 우리를 모두 불러모았다. “여러가지로 신세를 져서 미안하네만, 하나 더 부탁을 해야 할 것 같네. 아무래도 침대를 작업실에 두어야겠어. 집에 가서 침대에서 식사를 하거나 할 때는 손이 훨씬 덜 떨리거든, 아무래도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가 더 안정적이라서 그런 것 같아. 누워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고, 작업실 용 침대를 하나 만들어야겠네" 우리는 귀를 의심했다. 침대 작업이라니! 이미 휠체어를 타고 이리저리 물감을 흘리는 모습이 충분히 볼썽사납지 않은가! M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였고, 노년에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으로 본인의 명성에 흠집을 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확고한 그의 결정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침대 작업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받은 우리는 너무 크지 않은 나무 침대를 사서 바닥에 고정 바퀴를 달았고, 탄탄한 등받이와 함께 그가 작업할 수 있는 침대용 책상을 만들었다. 구석에 쌓인 그림이 아니었다면 이 곳은 화실이 아닌 목공소처럼 보였을 것이다. 모두 땀을 흘려가며 애쓴 덕분에 그는 침대에 누워 조금씩 다시 드로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관절염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 예전과 같은 수준의 작품이 나오지는 못했다.  그가 작업실에 돌아온 지 세 달 쯤 되었을 때, 그는 이상한 주문을 했다. M은 돌아온 이후 단 한장의 그림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표면이 거친 종이를 몇개 가져와보게. 그리고 내가 골라주는 종이를 직사각형으로 잘라 고아슈 물감을 칠해 말려줘, 색을 섞지는 말고, 몇가지 채도가 높은 컬러를 골라놨네" 드디어 선생은 계속되는 실패에 지쳐 노망이 난 것일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가 골라준 종이에 색을 칠했다. 선생을 우리가 칠하는 것을 보며 몇가지 색은 덧칠해서 색을 더 뚜렷하게 하기를 주문했다. 고아슈 물감은 빠르게 마르고 물에 섞어 채색하면 되기 때문에 고르게 색칠하는 작업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색색의 종이를 빨래 처럼 줄을 달아 건조했다. 첫번 째 작업한 종이가 거의 다 말라가던 금요일, 선생은 첫 번째 조수인 H를 제외하고 우리 모두를 집에 보냈다. 주말에는 푹 쉬고, 월요일에 보자는 말과 함께. 넋이 나간 것처럼 종이에 색칠을 반복하던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집에 왔다. 이제 다른 스승을 알아봐야 하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화가라는 직업이 의미가 있을 것일까? 마음이 답답해졌다. 한 때 나는 선생의 그림의 큰 감동을 받았다. 강렬한 색깔과 널뛰는 생동감은 생의 의미를 다시 찾아주는 느낌이었고, 그렇게 나는 그의 화실에서 일하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매일의 고된 작업도 그의 작품을 직접 마주하는 감동으로 모두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흐릿한 안개에 싸인 것만 같았다. 위대한 화가인 M도 시간의 저주는 피하지 못했고, 이제 괴상한 색칠 놀이에 빠진 노인네가 되어버렸다. 나는 노화와 함께 한 순간에 사라질 의미 없는 경력을 쌓는데 젊음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동네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한 층 깊이 절망에 빠졌다. 어김없이 월요일이 찾아왔다. 나는 주말동안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이 곳을 그만두겠다고 다짐했다. 그 동안 배운 것이 있으니 시골학교의 미술 선생님 자리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보다는 좀 더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아침 일찍 작업실을 찾았다. 아무도 없을 때 구석 구석 손길이 닿은 익숙한 곳들에 인사를 하고 싶었다. 텅 빈 작업실에 도착해, 습관처럼 환기를 하기 위해 안쪽 작업방에 들어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흰 벽에는 아름다운 모습의 정원과도 같은 그림이 걸려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간 나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색칠한 종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종이들이 여러 모양으로 붙어 있었다. 바닥에는 잘린 조각들이 수북했다. 색종이들은 어느 회화보다 생동감있는 모습으로 각자의 색을 빛내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봤을 때는 알 수 없던 충만함과 행복이 작품 전체에서  느껴졌다. 더이상 붓을 잡기 어려웠던 선생은 가위를 작업도구로 택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선명한 조각들이 낱장의 종이가 아닌 하나의 생명체처럼 다가와 아침 햇살과 함께 따뜻하게 나를 위로했다.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작품을 바라보던 나는 다른 이들이 올 시간이 되자 여느때와 같이 환기를 시키고, 공들여 창문을 닦고, 청소를 끝낸 후에 작업실에 앉았다. 금요일에 던지듯 놓고 간 붓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다시 붓을 깨끗하게 닦아 색칠을 시작했다.생명을 가진 모두에게 노화는 반드시 찾아온다. 물론 해삼처럼 나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생물도 존재 하지만 대부분의 생명체에게 노화는 필연적이다. 우리는 노화가 가진 무시무시한 힘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길거리 노파의 걸음걸이에서, 노인이 오래 산 집의 냄새에서, 어느날 삐져나온 흰머리카락에서 노화는 그 발톱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고난은, 이 노화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 사고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장이 끝나는 시점에서부터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예고된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이 쇠락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 그 일은 아주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아니, 어쩌면 ‘일어났다’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암덩어리는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M의 몸에 자리 잡았을 테니 어떤 전조 증상이나 예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까지는 누구도 그 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그 소식을 마주해야 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아니 살아있는 역사로 알려진 천재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특권이기에, 나는 그의 일화를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소한 것까지 모두 기록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 나의 일기를 펼쳐보면 마치 M의 다큐멘터리같다. 하긴 그가 워낙 정력적으로 일해대는 탓에 그의 어시스트가 된 이후 나에겐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기도 했다. – 암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도 M의 몸은 많이 노쇠해있었다. 일흔의 나이를 지나가고 있는 노화가는 붓을 쥐고 있는 것이 힘에 부쳐 손가락에 붓을 묶어서 작업하고는 했다. 관절염은 화가에게 올 수 있는 최악의 병 중 하나였다. 손가락에 힘이 달려 물건을 떨어뜨리기 일쑤였기에 M선생의 근처에 뜨거운 커피를 갖다놓는다거나 하는 것은 이 작업실에서는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다.  나의 아침 일과는 선생이 최대한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단 화실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내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창문의 먼지였다. 창문의 먼지가 한겹 쌓이면 화실의 빛도 그만큼 약해졌다. 나는 미묘한 빛의 변화가 선생의 작업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문을 청소할 때에는  짧지만 경건한 나만의 순서가 있었다. 먼저 바싹 마른 걸레로 창문을 닦고, 물기가 있는 밀대로 창문과 높이 있는 창문 틀까지 꼼꼼히 청소한 후 마지막으로 내가 아끼는 부드러운 천으로 물자욱을 마저 지워냈다. 지루하지만 이 작업을 끝낸 후 화실에 비치는 투명한 빛이 좋아서 나는 한 주에도 두 세번씩 이 과정을 거치고는 했다.  바닥과 가구,  창문 순서로 청소를 마치고 나면 M의 화구를 정리했다. 나는 어시스턴트로 들어와 1년이 지난 후에야 화구 정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선생은 어제 작업하던 모습 그대로 화구가 유지되는 것을 좋아했다. ‘작품의 연속성’을 위해 그렇다.’ 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그의 화구와 의자, 캔버스가 어제와 같은 자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먼지를 뒤집어 쓰지 않도록 했다. 물감통을 정돈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날 쓴 컬러를 그대로 빼어 팔레트 옆에 두었다. 여기저기 묻은 얼룩은 기름을 써서 최대한 깨끗하게 닦아냈다. 붓은 어제의 상태를 유지하되 너무 많이 써서 브러쉬가 뭉쳤을 때는 기름을 몇방울 떨어뜨려 부드럽게 만들고, 같은 크기의 새 브러쉬를 바로 쓸 수 있도록 숨을 죽여 옆에 놓아두었다. 밤 늦게까지 작업할 때 두르는 담요는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두개를 번갈아 가며 세탁해 먼지를 털어 잘 개켜 두었다.  조수들은 보통 새벽부터 일어나 이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가 화실에 나올 때는 대부분의 공간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아침의 루틴을 단순한 청소나 잡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아침 일과는 노쇠한 몸으로 계속해서 창작의 의지를 이어가는 대가의 예술에 한 점을 보태는 일이었다. 추운 아침 찬물에 걸레를 빨 때도 나는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그 일을 대했다.  그의 조수가 되는 것은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 적어도 12시간에서 14시간정도 쉼없이 일했고, 이는 몇몇 젊은 화가 지망생들이 이 화실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늘 긍정적이고, 환희에 가득찬 듯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지만 그 작품들이 탄생하는 과정은 지루하고 단순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일례로, 사람 얼굴 드로잉이 그러했다. M의 얼굴 드로잉은 너무나 간결해서 보는 사람은 단번에 ‘저 정도 그림은 나도 그리겠는 걸?’ 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그에게 ‘천재’라는 호칭을 너무 간단히 붙이데서 불만과 비슷한 감정마저 느꼈다. ‘천재’라는 단어에는 번뜩이는 영감으로 쉽게 작업하는 듯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옆에서 지켜본 바 그의 작업은 고통스러운 반복과 연습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 드로잉도 수천장을 다시 그리며 간결한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그는 이 드로잉이 ‘쉽게 그린 것 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하루의 작업을 끝내고 저녁이 되면 그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는 작품에 영혼과 체력을 모두 불어넣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그에게 암 선고가 찾아왔다. 다행히 수술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안 그래도 힘든 그의 작품 활동이 머지 않아 끝을 맺는 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그의 육체가 다른 고통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나는 경건하게 지켜오던 그의 예술이, 여전히 불타오르는 한 영혼의 창작이 육체의 노쇠함을 이기지 못해 마무리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새 M이 수술에 들어가는 날이 다가왔다. M은 발병 사실을 알고도 작업을 계속했다.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나는 이전과는 달리 허둥대며 그의 작업에 방해가 되기 일쑤였다. 그가 수술에 들어가자 나는 텅 빈 작업실처럼 그대로 끝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M은 수술을 하러 떠나며 작업실의 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을 남겼지만 조수 중 그 누구도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 결국 생의 끝에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사실, 시간이 인간에게 남기는 한계가 아직 젊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렸다.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 죽기 직전에야 빵을 한 조각 집어 우물댔고, 물을 삼키며 연명하듯 하루하루를 보냈다. 작업실 청소는 물론이고 열심히 하던 습작에서도 손을 놓았다. 무엇을 하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소멸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루하루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흐름을 알 수 없는 덩어리같은 시간이 지나자 M은 수술을 끝내고 회복에 들어갔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맞이한 수술은 그의 몸을 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문제가 없었던 그의 두 다리마저 그를 배신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여전했다. 처음에는 도움 없이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점점 두 팔에 힘을 더해 혼자 움직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종종 인사를 하러 갈 때마다, 나는 선생이 마치 그림작업을 할 때처럼 재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의사가 시킨 운동을 천천히 성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는 어렵지만 아직 운명이 그의 목숨까지 앗아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중간 중간 우리 조수들의 작업에 대해 묻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아 우리는 억지로 다시 습작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 떨림은 점점 심해져, 그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일은 요원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M이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진행 중이던 작업들을 잘 말려 종이에 싸서 보관해두었다. 먼지가 쌓여가던 캔버스와 화구도 정리해 한 켠에 세워두었다. 선생이 없이  조용하게 붓질과 스케치 소리만 들리는 작업실은 마치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같았다.  하지만 M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나의 예상을 깨고, 오래지 않아 휠체어를 타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먼지가 쌓인 창문이, 지저분한 바닥 얼룩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며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작업실이 전처럼 완벽하게 유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차렸겠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일 아침까지 휠체어 높이에 맞게 캔버스 다리를 조절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작업실 곳곳을 살피고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쉴새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우리는 전날 M이 돌아간 후로 모든 작업을 멈추고 작업실을 원상복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선생의 상태로 봤을 때 더 이상의 유의미한 작업은 힘들겠지만 노 화가의 마지막 의지를 꺾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 동안 쌓여있던 곳곳의 먼지와 쓰레기를 버리는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오밤중이 되어서야 청소는 끝났고, 모두는 녹초가 된 채 잠을 자고 씻지도 못한 얼굴로 작업실에 나왔다.  아침 9시가 되자, 선생은 믿을 수 없을만큼 전과 똑같은 표정과 기색으로 작업실에 등장해 전 날 우리가 높이를 조절해둔 캔버스 앞으로 갔다. 붓을 손에 묶고, 엉망으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작업을 시작했다. 몇 초나 흘렀을까, 우리는 떨리는 손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긴장감 어린 시선을 거두어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이 쥔 붓의 물감은 여기저기로 튀었지만 그는 여기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듯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월요일 오후, M은 우리를 모두 불러모았다. “여러가지로 신세를 져서 미안하네만, 하나 더 부탁을 해야 할 것 같네. 아무래도 침대를 작업실에 두어야겠어. 집에 가서 침대에서 식사를 하거나 할 때는 손이 훨씬 덜 떨리거든, 아무래도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가 더 안정적이라서 그런 것 같아. 누워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고, 작업실 용 침대를 하나 만들어야겠네" 우리는 귀를 의심했다. 침대 작업이라니! 이미 휠체어를 타고 이리저리 물감을 흘리는 모습이 충분히 볼썽사납지 않은가! M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였고, 노년에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으로 본인의 명성에 흠집을 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확고한 그의 결정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침대 작업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받은 우리는 너무 크지 않은 나무 침대를 사서 바닥에 고정 바퀴를 달았고, 탄탄한 등받이와 함께 그가 작업할 수 있는 침대용 책상을 만들었다. 구석에 쌓인 그림이 아니었다면 이 곳은 화실이 아닌 목공소처럼 보였을 것이다. 모두 땀을 흘려가며 애쓴 덕분에 그는 침대에 누워 조금씩 다시 드로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관절염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 예전과 같은 수준의 작품이 나오지는 못했다.  그가 작업실에 돌아온 지 세 달 쯤 되었을 때, 그는 이상한 주문을 했다. M은 돌아온 이후 단 한장의 그림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표면이 거친 종이를 몇개 가져와보게. 그리고 내가 골라주는 종이를 직사각형으로 잘라 고아슈 물감을 칠해 말려줘, 색을 섞지는 말고, 몇가지 채도가 높은 컬러를 골라놨네" 드디어 선생은 계속되는 실패에 지쳐 노망이 난 것일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가 골라준 종이에 색을 칠했다. 선생을 우리가 칠하는 것을 보며 몇가지 색은 덧칠해서 색을 더 뚜렷하게 하기를 주문했다. 고아슈 물감은 빠르게 마르고 물에 섞어 채색하면 되기 때문에 고르게 색칠하는 작업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색색의 종이를 빨래 처럼 줄을 달아 건조했다. 첫번 째 작업한 종이가 거의 다 말라가던 금요일, 선생은 첫 번째 조수인 H를 제외하고 우리 모두를 집에 보냈다. 주말에는 푹 쉬고, 월요일에 보자는 말과 함께. 넋이 나간 것처럼 종이에 색칠을 반복하던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집에 왔다. 이제 다른 스승을 알아봐야 하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화가라는 직업이 의미가 있을 것일까? 마음이 답답해졌다. 한 때 나는 선생의 그림의 큰 감동을 받았다. 강렬한 색깔과 널뛰는 생동감은 생의 의미를 다시 찾아주는 느낌이었고, 그렇게 나는 그의 화실에서 일하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매일의 고된 작업도 그의 작품을 직접 마주하는 감동으로 모두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흐릿한 안개에 싸인 것만 같았다. 위대한 화가인 M도 시간의 저주는 피하지 못했고, 이제 괴상한 색칠 놀이에 빠진 노인네가 되어버렸다. 나는 노화와 함께 한 순간에 사라질 의미 없는 경력을 쌓는데 젊음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동네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한 층 깊이 절망에 빠졌다. 어김없이 월요일이 찾아왔다. 나는 주말동안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이 곳을 그만두겠다고 다짐했다. 그 동안 배운 것이 있으니 시골학교의 미술 선생님 자리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보다는 좀 더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아침 일찍 작업실을 찾았다. 아무도 없을 때 구석 구석 손길이 닿은 익숙한 곳들에 인사를 하고 싶었다. 텅 빈 작업실에 도착해, 습관처럼 환기를 하기 위해 안쪽 작업방에 들어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흰 벽에는 아름다운 모습의 정원을 연상시키는, 생명이 넘치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간 나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색칠한 종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종이들이 여러 모양으로 붙어 있었다. 바닥에는 잘린 조각들이 수북했다. 색종이들은 어느 회화보다 생동감있는 모습으로 각자의 색을 빛내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봤을 때는 알 수 없던 충만함과 행복이 작품 전체에서  느껴졌다. 더이상 붓을 잡기 어려웠던 선생은 가위를 작업도구로 택한 것이다. 단순하지만 선명한 조각들이 낱장의 종이가 아닌 하나의 생명체처럼 다가와 아침 햇살과 함께 따뜻하게 나를 위로했다.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작품을 바라보던 나는 다른 이들이 올 시간이 되자 여느때와 같이 환기를 시키고, 공들여 창문을 닦고, 청소를 끝낸 후에 작업실에 앉았다. 금요일에 던지듯 놓고 간 붓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다시 붓을 깨끗하게 닦아 색칠을 시작했다.위 글은 앙리 마티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And more단편 <색종이>의 M선생은 야수파의 창시자, 앙리 마티스입니다. 1869년생인 마티스는 그가 일흔 두살이 되던 해 암을 선고 받습니다.  암선고를 받기 전에도 그는 이미 오래된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을 잘 움직이지 못해 붓을 손에 묶어 작업하고는 했습니다.  암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는 휠체어에 앉아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작업을 계속합니다.  관절염이 심해져 더이상 붓을 잡을 수 없을 때, 그는 고아슈 물감을 칠한 종이를 잘라 데코파쥬, 혹은 콜라쥬 작업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새로운 그의 작업 방식에 놀랐지만, 그는 이후로도 몇십년간 , <이카루스>, <왕의 슬픔>과 같이 위대한 작업들을 해냅니다.  이러한 색종이(CUT OUT)작품은 초반에는 작은 크기였지만, 나중에는 벽화의 크기로 커집니다.  그는 암 수술을 받고 난 마지막 14년을 “두번째 삶”이라고 종종 불렀고, 이 시기에 그의 활동성은 크게 제한되었지만 그는 예술 작업의 형태로 정원을 거닐 수 있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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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대신 가위로 ‘색종이 오리기’… 마티스의 색다른 매력속으로

앙리 마티스가 종이 오려붙이기 작업으로 만든 20편의 작품을 실은 아트북 ‘재즈’ 가운데 하나인 ‘피에로의 장례’(1947년). ‘재즈’ 수록작들은 마티스가 서커스와 연극에서 본 광대 사자 검 등을 소재로 만들었다.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제공

단순하고 대담한 터치가 돋보이는 판화 ‘3개의 얼굴, 우정’(1951년), 회화적 완성도가 뛰어난 석판화 ‘성모를 위한 습작, 베일을 쓴 성모’(1950∼1951년)와 ‘실내, 독서’(1925년).(왼쪽부터)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제공

“나는 항상 내 노력을 숨기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내게 작품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결코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내 작품이 봄날의 가벼운 기쁨을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마티스는 ‘색채의 해방자’ ‘야수파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선의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기호같이 단순해진 형태를 만들어낸 작업은 누구보다 감각적이었다.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앙리 마티스: 라이프 앤 조이’에서는 마티스의 드로잉과 판화 총 196점을 선보인다. 마티스는 선 안에 색이 채워졌던 과거 화풍에서 벗어나 색만으로 형태를 만들어낸 작품들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는 색면을 탐구했던 마티스의 회화 작품보다는 그가 말기에 선보인 드로잉과 판화, 색종이 오리기에 주목했다. 출품작은 세 명의 컬렉터 소유품으로 이뤄졌다. 24점을 제외한 모든 작품은 30년 넘게 마티스의 판화를 수집해온 영국 런던의 아트 컬렉터 버나드 제이콥슨이 대여했다.마티스의 간결한 드로잉과 판화 작품은 이미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인기다. 마티스의 작품을 활용해 만든 포스터나 엽서는 일명 ‘감성샷’의 소재로 곧잘 등장한다. 여태껏 크게 조명 받은 적 없던 마티스의 드로잉이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건 특유의 모던함과 경쾌한 에너지 때문이다. 마티스는 1906년에 발표한 ‘삶의 기쁨’ 이후 드로잉을 보다 발전시켰다. ‘서 있는 여인의 누드’(1949년)에서 보듯 그의 드로잉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판화 ‘3개의 얼굴, 우정’(1951년)이나 ‘성모를 위한 습작, 베일을 쓴 성모’(1950∼1951년)를 보면 마티스의 선은 그의 손에 실린 무게에 따라 굵어지거나 가늘어지기도 하고, 들쭉날쭉하거나 직선이 되기도 한다.전시는 마티스가 평생 시도한 6가지 판화 기법에 따라 작품이 구분돼 있다. 기법에 따라 단순함, 디테일 등 매력이 모두 다른데 이 중 물과 기름의 반발력을 이용한 기법인 석판화 작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드로잉이라 착각할 정도로 치밀한 ‘실내, 독서’(1925년)를 보면 앞선 작품들과 다른 섬세함을 엿볼 수 있다. 마티스는 색채 화가로 유명했음에도 거의 흑백 판화만을 만들어왔다. 마티스가 자신의 판화 작품이 선대 판화가들의 작품과 견주어지길 바랐을 것으로 추측되는 대목이다.전시 후반부에는 가위로 한 드로잉이라 할 수 있는 ‘종이 오려붙이기 작업(컷아웃)’이 있다. 1940년 십이지장암 진단을 받은 마티스는 이듬해 수술을 받아 병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때 그는 붓 대신 가위를 들었고 색종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표작이 20편의 컷아웃 작품을 수록한 아트북 ‘재즈’(1947년)다. 마티스는 큰 종이 위에 밝은 색상을 칠하고, 칠한 종이를 가위로 오려 모양을 만들어냈다. ‘이카루스’(1946년) ‘푸른 누드’(1952년) 등 작품을 만들어내며 가위질에서 유동성을 발견한 그는 “가위는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가위를 활용한 작업 과정을 ‘가위 그리기’라 불렀다.마티스는 재현을 포기한다면 그 대가로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명료화했고 불필요한 부분은 화면에서 제거했다. 그래서인지 전시는 내내 가볍고 세련된 느낌을 풍긴다. 마티스가 세계적으로 더더욱 사랑받는 이유일 테다. 호주 시드니 주립미술관과 앙리 마티스 컬렉션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국 볼티모어 미술관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마티스 특별전이 개최되고 있다. 일본 도쿄와 중국 상하이, 베이징에서도 마티스전이 열릴 예정이다. 4월 10일까지. 1만3000∼2만 원.김태언 기자 [email protected]

마티스 색종이 오리기, 이브 생로랑 드레스로 재탄생

[영감의 원천] 패션이 된 그림

루마니아 민속 의상 풍의 블라우스, 알록달록한 식물 무늬의 아플리케(천 조각을 오려 붙인 것)로 장식된 드레스….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1936~2008)의 1980년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 의상) 쇼는 옷으로 재탄생한 앙리 마티스(1869~1954) 작품의 향연이었다. 이 패션과 미술의 만남은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생로랑은 이미 65년에 피에트 몬드리안의 삼원색 직각 추상화를 발랄한 일자형 원피스로 만들어서 명성을 떨쳤고, 또 “언제나 미술 작품을 동경하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춤추듯 꿈틀거리는 그림 속 패턴

생로랑, 움직이는 색채 의상 제작 독특한 재료로 활기 발랄한 표현

세계 유명 패션 거장들에게 영향

마티스, 직접 발레 의상 만들기도

오히려 마티스는 생로랑에게 좀 늦게 소환된 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티스야말로 가장 패션 친화적인 20세기 미술 거장으로 꼽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가 패셔니스타였다는 것은 아니고(그의 사진들로 보면 오히려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의 그림에 무늬가 화려하고 인상적인 옷, 특히 민속 의상을 입은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다는 얘기다. ‘마닐라 숄’(1911), ‘노랑 드레스’(1929~31), ‘루마니아 블라우스’(1940)처럼 아예 의상이 그림 제목인 경우도 적지 않다. 게다가 마티스는 1920년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의 무대 의상도 담당했다. 그때 그가 한 말을 보면 왜 그가 의상과 패턴에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의상을 움직이는 색채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물이 내게 주는 감정을 그린다”

실내외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부터 신화 그림까지 아우르는 마티스의 회화를 보면 언제나 음악적 흐름이 강하게 느껴진다. 색채들이 명암과 음영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배열돼 있으면서 리드미컬한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티스가 말년에 집중한 컷아웃, 즉 과슈로 색칠한 종이를 여러 형태로 오린 뒤 핀으로 고정해 구성한 작품에서 극대화된다. 생로랑은 80년 오트 쿠튀르 쇼에서 마티스의 컷아웃 중 ‘다발’과 ‘달팽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드레스를 내놓았다. 마티스가 색칠한 종이를 오려 붙였듯, 알록달록한 새틴 조각을 오려 붙여 “움직이는 색채의 의상”을 만든 것이다.

컷아웃 이전부터 마티스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작가의 감정을 담은 색채를 배열해 화폭 안에다가 하나의 새롭고 독립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르네상스 이후부터 모던아트 이전까지 서구 화가들이 추구한 것, 즉 ‘어떻게 하면 명암법과 원근법을 잘 구사해 3차원 현실 세계를 2차원 화폭에 그럴듯하게 재현해낼까’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셈이었다.

이것은 마티스가 많은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와도 다른 길을 간 것이었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보이는 사물의 색채를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마티스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마티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문자 그대로 테이블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일으키는 감정을 그린다.”

색채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했다. “색은 단순할수록 내면의 감정에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 가령 파랑은 강렬한 보색을 동반할 때 날카로운 징 소리처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빨강이나 노랑도 마찬가지다. 화가는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 전에서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의 그림을 본 평론가 루이 보셀은 그 격정적 색채가 징 소리보다 야수의 부르짖음처럼 들렸는지 이들에게 ‘야수파(Fauvism)’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렇게 주관적이고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붉은 실내’ 연작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디저트; 붉은 조화’(1908)나 ‘붉은 아틀리에’(1911)를 보면, 짙은 빨간색이 화면 대부분을 지배한다. 어느 집 벽과 테이블과 바닥이 이 그림들처럼 실제로 온통 빨간색이겠는가. 그럼에도 마티스가 이 모든 것을 붉게 칠한 이유는 이 실내가 그에게 불러일으킨 감정과 활기와 생명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마티스는 “색채 못지않게 선도 중요하다”고 했다. 꿈틀거리는 선을 통해서 색채가 춤을 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달리 춤을 좋아하고 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본다. 표현력이 풍부한 움직임, 율동감 있는 움직임, 내가 좋아하는 음악 같은 것을…춤은 내 안에 있다.” 이 말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 그의 대표 걸작인 ‘춤’(1909)이다. 이 그림 속 인물들은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데, 우리나라에 강강술래가 있듯 이것이야말로 동서고금 존재해온 가장 원초적인 춤일 것이다. 이런 춤의 형태에서, 또 벌거벗은 인물들의 건강한 붉은 피부에서, 그리고 겅중겅중 뛰며 돌아가는 그들의 팔다리와 몸통에서, 약동하는 힘과 거칠고 순수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그 폭발적인 원시적 에너지는 폴 고갱의 타히티 그림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다(참고로 마티스 또한 타히티에 다녀왔고 영감을 받았다).

죽음 앞두고도 멈추지 않은 변주

‘춤’처럼 동적이고 원시 신화적인 그림뿐만 아니라 실내 정경 그림들에서조차 약동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벽면과 가구의 패턴, 또 등장인물의 옷 무늬가 춤추듯 꿈틀거리며 반복되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모로코를 방문하고 이슬람 미술의 식물 패턴과 기하학 패턴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실내 풍경화에 응용해 지중해 연안의 아르카디아(전원적 낙원)적 삶의 활기와 즐거움을 구현했다. 유럽 화가들을 관통해온 아르카디아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화가 중 하나로 자주 뽑히곤 한다.

하지만 마티스도 인간의 운명인 ‘병마와 노쇠’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일흔을 넘긴 41년에는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는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3~4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의사들에게 부탁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그는 13년을 더 살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했던 수술은 나를 완전히 소생시켰을 뿐 아니라 나를 철학자로 만들었다.”

노쇠와 후유증으로 그는 붓을 제대로 들 수 없어 그림을 그리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한탄하며 누워 지내는 대신 자신이 그전부터 조금씩 실험해오던 컷아웃을 본격적으로 창작했다. 그래서 평론가 로버트 휴즈의 말처럼 “대부분의 화가들이 과거의 작품을 우려먹거나 붓을 놓고 임종을 기다릴 시기에 마티스는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다시 들어가 세련된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작가가 말년에 새로운 재료를 써서 만든 새로운 작품이 제2의 전성기 작품으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것은 마티스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거장 피카소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마티스의 컷아웃 작품들은 발랄하고, 생의 환희가 넘치고, 또 그 독특한 재료 때문에 디자인에 적용되기 쉬워서, 생로랑뿐만 아니라 발렌티노, 이세이 미야케,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기라성 같은 디자이너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그래도 마티스와 가장 관련이 깊은 이는 여전히 생로랑인 것 같다. 생로랑이 세상을 떠난 뒤 2009년에 열린 그의 소장품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것이 마티스의 정물화 ‘노란 앵초, 푸른색과 분홍색의 테이블보’이기도 했으니까. 이 그림은 3590만 5000유로(당시 환율로 약 700억원)에 팔렸다. 생로랑은 불과 21살에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고 20대 후반에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해 명성을 떨친 천재 디자이너였지만, 군 복무 시절의 트라우마와 지속적인 성공에 대한 압박감, 그리고 그것을 잊기 위해 복용한 코카인에 중독돼 평생을 시달렸다. 그럴수록 생로랑은 마티스의 굴하지 않는 삶의 기쁨을 동경하고 그의 기운과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미술전문기자. 서울대 경제학부 학·석사, 런던대 골드스미스컬리지 문화학 석사, 홍익대 예술학과 박사 과정 중. 저서로 『그림 속 경제학』(2014), 『명화독서』(2018), 『광대하고 게으르게』(2019) 등이 있다.

20세기 최고 화가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판화·색종이 오리기

앙리 마티스의 종이 오려붙이기 작품 20편이 실린 아트북 ‘재즈’ 가운데 하나, ‘피에로의 장례’(1947년). ‘재즈’ 수록작들은 마티스가 서커스·연극에서 본 광대·사자·검 등을 소재로 만들었다.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왼쪽부터) 단순하고 대담한 터치가 돋보이는 판화 ‘3개의 얼굴, 우정’(1951년), 회화적 완성도가 뛰어난 석판화 ‘성모를 위한 습작, 베일을 쓴 성모’(1950∼1951년)와 ‘실내, 독서’(1925년).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 ‘앙리 마티스: 라이프 앤 조이’에서 마티스의 드로잉과 판화 총 196점을 볼 수 있다(4월 10일까지). 마티스(1869∼1954)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라고 평가된다. ‘색’만으로 ‘형태’를 만들어낸 작품들이 유명하지만, 이번 전시는 드로잉·판화, 색종이 오리기 같은 말년 작품에 주목했다. 세 명의 컬렉터 소장품들이다. 24점을 제외한 나머지가 30년 넘게 마티스의 판화를 수집해온 영국인 버나드 제이콥슨이 대여했다. 호주 시드니 주립미술관과 앙리 마티스 컬렉션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국 볼티모어 미술관에선 작년 말부터 마티스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베이징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마티스의 드로잉과 판화는 이미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인기다. 그의 작품을 활용한 포스터·엽서가 일명 ‘감성샷’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특유의 모던함과 경쾌한 에너지 때문이다. 다양하면서도 단순한 것, 질서·조화의 창조가 마티스의 과제였다. 본인의 표현을 빌면, “균형 잡힌 무구(無垢)한 그림” “탈진한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그림”을 추구했다. ‘색채의 해방자’ ‘야수파 창시자’라지만 ‘선의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판화 ‘3개의 얼굴, 우정’(1951년)이나 ‘성모를 위한 습작, 베일을 쓴 성모’(1950∼1951년)는 마티스의 손에 실린 무게 만큼 굵어지거나 가늘어지고, 들쭉날쭉하거나 직선이 된다. 이번 전시에선 그가 평생 시도한 6가지 판화 기법을 따라 작품을 구분해 놓았다. 드로잉이라 착각할 정도의 ‘실내, 독서’(1925년)는 앞선 작품들과 다른 섬세함을 보여준다.

전시 후반부엔 ‘종이 오려붙이기 작업(컷아웃)’이 있다. 1941년 십이지장암 수술 후 병상에 있으면서 그는 가위를 들고 색종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 때의 대표작이 20편의 컷아웃 작품을 수록한 아트북 <재즈>(1947년)다. 큰 종이 위에 밝은 색상을 칠하고, 칠한 종이를 가위로 오려 모양을 만들어냈다. 가위질에서 유동성을 발견한 그는 “가위가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라고 평했다. 심지어 가위를 쓰는 작업 과정을 ‘가위 그리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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