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젊은 시의 언어적 감수성과 현실적 확산 능력을 함께 갖췄다’는 평을 받으며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박준 시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당시 한 인터뷰에서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엄숙주의에서 해방된 세대의 가능성은 시에서도 무한하다고 봐요”라 말한 바 있다. 그렇게 ‘작고 소외된’ 것들에 끝없이 관심을 두고 탐구해온 지난 4년, 이제 막 삼십대에 접어든 이 젊은 시인의 성장이 궁금하다. 모름지기 성장이란 삶의 근원적인 슬픔을 깨닫는 것일 터, 이번 시집에 이 세계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하는 죽음의 순간들에 대한 사유가 짙은 것은, 박준 시인의 깊어져가는 세계를 증거할 것이다.1.박준 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서사성’을 들 수 있다. 일련의 서사 위에 최근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전위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대신 낯설지 않은 서정으로 무장해 오히려 참신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특정한 사건사고의 묘사로 읽히는 시가 빈번하다는 점인데, 그것이 시적 화자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건을 기록해두는 데 의의를 두는 듯해 더욱 눈에 띈다.반디미용실에서 처음 낙타를 보았습니다 미용실 누나는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 사이에 제 머리를 묻고 비뚤어짐을 가늠했고 저는 실눈만 떴다 감았다 했습니다 (……) 누나는 동네 아저씨들 술자리의 기본 안주가 되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의 커피 잔에서 설탕과 함께 휘저어졌습니다 (……) 낙타가 떠난 날은 감나무집 형이 소주를 댓병으로 마신 날이었습니다 형 가슴보다 까맣게 그을린 반디미용실 건물, 석유 말 통과 담뱃불이 반딧불이처럼 날아들어왔다는 미용실 주인은 양귀비 염색약처럼 까맣게 울었습니다 (……) 낙타가 사하라로 갔는지 고비로 혹은 시리아 사막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마음을 걷던 발자국은 아직도 남아 저는 요즘도 간혹 그 발자국에 새로 만나는 미인들의 흰 발을 대어보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미인의 발」 부분총무는 채점을 하다 말고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매년 이차에서 떨어졌던 그도, 탈출해 나왔다면 내년쯤에는 아마 이등병이 되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왜 결핍의 누대(累代)에는 늘 붉은 줄이 그어졌는지 알고 계실까요?3층에 사는 여자들이 이차를 마치고 돌아온 듯했습니다 공동 주방에서 부치는 달걀 냄새가 온 방실을 점유하고 있었죠 스탠드가 꺼지고 소방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습니다-「유성고시원 화재기」 부분‘반디미용실 화재, 여직원 1명 사망’으로 일간지 사건사고란에 간략히 보도되고 끝났을 일을 시인은 시로 남겼다. 덕분에 우리는 그녀를,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고 애도할 수 있다. 구청에서 직원이 나올 때마다 정신이 돌아와 바른말을 하는 치매 노인이 실은 사복을 입고 온 군인에게 속아 남편의 은신처를 알려주고 말았던, 그리하여 혼자가 되었던 사연을 기록으로 밝혀줌(「기억하는 일」)으로써 우리는 노인을, 노인의 바른말을 이해할 수 있다. 「유성고시원 화재기」를 읽으면 우리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떠올려볼 수 있다. 화재가 누전인지 방화인지 끝내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울먹울먹했던 것들이 캄캄하게 울어버린 것이라 생각”된다는 진술자의 모호한 말이 어쩐지 명백한 진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역시 ‘유성고시원에서 화재가 일어나 얼마의 재산피해와 인명피해가 있었다’로 요약될 일이었다. 이렇듯 박준 시인은 ‘사건’을 ‘삶’으로 바꾼다. 대개 결핍된 사람들의 삶이다. “결핍의 누대(累代)”를 사는 사람들. 시인은 들리지 않고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들리고 보이게 기록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복원한다. 기억되도록 하는 일, 그저 그런 삶이라 치부되지 않도록 보존하는 일, 그것은 박준 시인이 불편한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자 그 안에서 쉬이 잊힌 숱한 삶들을 애도하는 형식일 것이다.2.불편한 세계를 사는 시적 화자는 자주 아프다. “나는 매일 병(病)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용산 가는 길」), “빛을 쐬면서 열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은 앓았다”(「2:8」),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눈을 감고」),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꾀병」) 등과 같이 시집에는 병의 기록이 무수하다. 어째서인가.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마음 한철」)는 지나간 사실, “가족이 앉은 돗자리 위로 청룡열차 선로가 만든 그늘이 옥(獄)의 창살처럼 내”렸던 유년의 기억, 수학여행에 가지 못하고 “흙에 종이를 묻는 놀이”를 하며 “결국 무엇을 묻어둔다는 것은 시차(時差)를 만드는 일이었고 시차는 그곳에 먼저 가 있는 혼자가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온몸에 새겨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범박한 일상 속에서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눈썹」)니다가 문득 고독한 자아를 마주하고 세계에 눈을 뜨며 얻은 일종의 성장통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자신의 병을 ‘꾀병’이라 말하는 것은 자신보다 이 세계가 더 아프리라는 인식에서 시작될 터이다.3.아픈 ‘나’의 이마를 짚어주는 손이 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라고 웃으며 말하는 ‘미인’이다. ‘유서도 못 쓰고 아픈’ 내 곁에 누워 잠든 미인(「꾀병」),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하는 미인(「호우주의보」). 시집 곳곳 출몰하는 미인은 ‘나’와 세계를 연결하고,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 활약한다. 때로는 그리움의 대상이자 연정의 대상이기도 한데, 그것이 이성(異性)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의, 그리고 시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인의 열망, 이상향으로서의 ‘미인’으로도 충분히 읽히며, 이는 끊임없이 앓고 있는 시적 화자를 지탱해주는 지향점으로 기능한다.그는 이 세계가 자신의 위장 속에서 결국 소화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에 시달린다. 위장 안에서 소화되지 못하는 세계도 언젠가는 불쑥 바깥으로 나온다. 아마도 더이상 이 세계를 위장 안에 담고 있지 못할 거라는 시달림. 그 시달림은 소화되지 못한 세계를 바깥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동력이다. 시달림은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 걸쳐 있는/ 희끄무레한 잔금처럼 누워”(「미신」) 있는 상태의 떨림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 떨림의 간곡함이 언어로 환원되었다. 우리는 그 결과를 ‘박준의 첫 시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허수경 발문,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 부분세계는 내내 불편한 것일 터이고, 개인의 고통 역시 사라질 수 없는 것, 그러나 그것들 모두 쉽게 잊진 않으리라는 박준 시인의 윤리의식은, 그 ‘떨림의 간곡함’은 진정성 있는 언어로 남아 독자들의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남길 것이라 기대한다. 닫기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박 준 시집”
강 일 송
오늘은 요즘 서점가에서 핫(Hot)한 시집 한 권을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시인 박준(1983~)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
습니다. 2008년 계간 실천문학 “모래내 그림자극”으로 등단하였고, 2013년 신동엽문학상
시부문 수상을 하였습니다.
뛰어난 감성을 지닌 젊은 시인의 시 몇 편을 함께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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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 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
파릇한 젊디젊은 나이의 시인은, 전혀 그의 나이답지 않은 감성의 그늘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 철봉에 오래 매달리면 친구
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자랑이 되는 나이가 아닙니다.
몸이 아픈 일도, 눈이 작은 외모도, 쏟아내었던 눈물도 자랑이 아니라합니다.
오히려 작은 눈에서 많이 흘렸던 당신의 그 슬픔이야말로 진정한 자랑이 될 수 있다합니다.
예전부터 울면 바보야, 라는 말이 있었지요. 이런 관점에 의하면 슬픔은 바보스럽고 자랑이
될 수 없지만 박준 시인의 시에서는 알맞게 자랑이 됩니다.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에 이어져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어가고 인정을 잃어가겠지요. 시인은 이런 슬픔이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자연을 살린다고 느끼나봅니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안치환의 노래 가사처럼, 이런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사람의
눈동자의 맺음새가 시인은 참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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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 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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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는 이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대표시입니다. 시집의 제목에 오른 시는
시인의 마음에 가장 드는 시이거나, 시집의 시상 한가운데를 흐르는 무언가가 있어서
일것입니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은 젊은 나이지만 많은 삶의 어려움을 통과해 왔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간결한 생계의 수단을 가지고 있고, 주위에는 날씨를 흔쾌히
이야기해주는 새로운 동료가 있나봅니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자서전을 써주고 생계를 이어가는 글쟁이는 쓰다보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일기장과 닮은 글을 쓰게 됩니다. 당연한 이치겠지요.
이 시집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일 것입니다. 아픈 사람은 보통 약을 지어 먹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당신의 이름을 지어서 하루도 아니고 며칠은 먹었다 하네요.
어떤 용한 약보다 당신의 이름은 나를 치유하고 나를 일깨우는 이름인가 봅니다.
내 이름이 이 세상 누군가에게 힘들 때 지어먹을 보약같은 이름이 된다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시인의 믿음처럼 나도 이 세상에서 만나는
만남 또한 모두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 더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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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는 일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
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
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
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
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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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몇 줄의 문장 속에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입니다.
아들을 아버지라 부르고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던 할머니가 구청 직원이 오면 순식간에
정신이 돌아옵니다. 얼마나 평생에 걸쳐 뼈아픈 경험을 했으면 그러할까요.
사복을 입은 군인에게 거처를 알려줘 남편을 잃은 할머니의 그 긴 세월에 걸친 회환,
죄책감, 분노, 외로움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구청 직원이 오면 치매도 누르지 못하는 기억의 돌출을 만들어냅니다.
시는 힘이 강하다 합니다. 몇 줄의 시가 현대사의 아픔을 절절하게 전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말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아름다운 당신이 있고, 그 아름다움을 따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 세상은
줄곧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미신
올해는 삼재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혀를 깨물었다
나는 학생도 그만하고
어려지는, 어려지는 애인을 만나
잔디밭에서 신을 벗고 놀았다
두 다리를 뻗어
발과 발을 맞대본 사이는
서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어린 애인에게 들었다
나는 빈 가위질을 하면
운이 안 좋다 하거나
새 가구를 들여놓을 때도
뒤편에 王 자를 적어놓아야
한다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클로버를 찾는
애인의 작은 손이
바빠지고 있었다
나는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 걸쳐 있는
희끄무레한 잔금처럼 누워
아직 뜨지 않은 칠월 하늘의
점성술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동백이라는 아름다운 재료
삼사월이면 애역(呃逆)이 잦고 팔뚝이 가려웠다 원동기 소음기에 덴 상처와 짧은 손끝에서 무너지던 새벽과 새로 배운 어려운 욕들이 동백이 피어 있는 나무 아래서 어울렸다 커다란 꽃잎을 접는 대신 서로에게 매달리고 죄어들며 기생하던 시절 벌어진 일들이 이리도 높이 자랐다 도망치듯 떠나온 이곳의 봄날에서도 낯익은 것들이 돋아나더니 다시 송이째 툭툭 떨어졌다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의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태백중앙병원
태백중앙병원의
환자들은
더 아프게 죽는다
아버지는 죽어서
밤이 되었을 것이다
자정은
선탄(選炭)을 마친 둘째형이
돌아오던 시간이다
미닫이문을 열고
드러내 보이던
형의 누런 이빨 같은
별들이 켜지는 시간이다
광장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얘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유월의 독서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제 눈 속 가득 찬 물기들을
그 빛을 보며 말려갔겠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믿을 수 있는 나무는 마루가 될 수 있다고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이 말했다 마루는 걷고 싶은 결을 가졌고 나는 두세 시간 푹 끓은 백숙 자세로 엎드려 미인을 생각하느라 무릎이 아팠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어 있다
미인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을 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의 솜털은 어린 별 모양을 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은 밥을 먹다가도 꿈결인 양 씻은 봄날의 하늘로 번지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熱)들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은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별들의 이주(移住)
-화포천
오월 천변(川邊)에서는
멀리 보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숭어는 겨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뜹니다
천변의
긴 밭에서
새들은
어제 심은 들깨씨를
잘도 파 물어갔고요
노인은
막대기에 양철통을 들고
밭으로 나가
새들을 쫓다가
졸다가
가져간
찰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새로 울고 싶은
오월의 밤하늘에는
날아오른 새들이
들깨씨를 토해 놓은 듯
별들도 한창이었습니다
마음 한 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네’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문병
– 남한강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 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가족의 휴일
아버지는 오전 내내
마당에서 밀린 신문을 읽었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종로에나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날은 찌고 오후가 되자
어머니는 어디서
애호박을 가져와 썰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마을버스 차고지에는
내 신발처럼 닮은 물웅덩이
나는 기름띠로
비문(非文)을 적으며 놀다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바퀴에
고임목을 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번 주도 오후반이야” 말하던
누나 목소리 같은 낮달이
길 건너 정류장에 섰다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
나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벽제의 긴
언덕을 내려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답 대신 근처 식당가로
차를 돌린 나는 오늘 알았다
기억은 간판들처럼
나를 멀리 데려가는 것이었고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너는 오늘
내가 밀어넣었던
양평해장국 빛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시켜 먹던
할머니보쌈이나 유천집냉면 같은 색이라서
그걸 색(色)이라고 불러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에
네 짧은 이름처럼
누워 울고 싶은 오늘
달게 자고
일어난 아침
너에게 받은 생일상을 생각하다
이건 미역국이고 이건 건새우볶음
이건 참치계란부침이야
오늘 이 쌀밥은
뼈처럼 희고
김치는 중국산이라
망자의 모발을 마당에 심고
이듬해 봄을 기다린다는
중국의 어느 소수민족을 생각하는 오늘
바람은
바람이어서
조금 애매한
바람이
바람이 될 때까지
불어서 추운
새들이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나는 오늘
세상 끝 등대 1
내가 연안(沿岸)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 지은이 / 박준
– 펴낸 때 / 2012년 12월
– 펴낸 곳 / (주)문학동네
박 준
– 1983년 서울 출생.
–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2008년 《실천문학》 으로 등단.
–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가 있음.
– 신동엽문학상, 젊은예술가상 수상.